[수요단상] 이동규 청주순복음교회 담임목사 

솔로몬이 기록했다고 알려진 구약성경의 전도서는 인생의 허무함을 이야기한다. 전도서는 이와 같은 고백으로 시작한다.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 1:2)

요즘 우리의 삶에서도 이런 허무함을 느낄 때가 있다. 사람들이 ‘정의’나 ‘공정’의 문제라고 부르는 사건들이 일어날 때마다 그렇다.

세상은 불공정하다. 가진 사람은 더 쉬운 방법으로 계속해서 더 많이 가질 수 있지만 없는 사람은 그 있는 것도 빼앗기는 경우가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법과 불법의 문제를 넘어 이제는 정의나 도덕적인 책임의 문제에 대해서도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런데 여기 한 가지 문제가 있다. 세상의 불공정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목소리 역시 얼마나 공평한가 하는 문제이다. 어느 누군가에게는 조금의 여지도 없이 가혹한 기준을 제시하는가 하면 다른 누군가에게는 아주 넓은 아량을 베풀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정의의 문제는 무엇을 ‘정의’라고 말하는 것은 물론, 다른 누군가의 불의를 지적하는 것조차 쉽지 않은 일이다.

한 번은 바리새인들이 예수 앞에 간음을 저지르다가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을 데리고 왔다. 그리고는 예수를 향해서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요 8:5)라고 묻는다.

그러자 예수는 저마다 손에 돌을 들고 서 있는 사람들을 향해서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요 8:7)고 말한다.

이에 사람들은 한 사람, 두 사람 자리를 피하더니 급기야 예수와 잡혀 온 여인 외에는 아무도 남지 않게 되었다.

이 장면은 세상에서 정의를 외치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일인지를 알려주는 동시에 또한 세상을 향해 정의를 외치는 가장 좋은 방법이 무엇인지를 알려준다. 그것은 바로 내 자신은 반드시 정의가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간음한 여인을 돌로 치라는 명령은 간음을 하지 못하도록 사전에 막으려는 것에 그 초점이 있는 것이지 간음한 여인을 향해 돌을 들고 던지는 사람들에게 면죄부를 주기 위한 것이 아니다.

사실 모세가 말한 이 율법의 내용대로 자신있게 돌을 던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예수는 세상에서 정의를 이루는 일이, 불의를 향한 분노의 방법으로는 절대적으로 불가능함을 보여준다. 정의는 세상의 모든 불의를 심판함으로가 아니라 우리 자신이 늘 불의를 행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이는 우리 모두는 스스로를 정의라고 말할 수 없으며 기껏해야 불의를 행하지 않기 위한 노력만이 있을 뿐이다.

이와 같은 사실을 깨달을 때 우리는 스스로를 정의라고 착각할 때 보다 오히려 더 정의와 가까워질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정의의 문제란 내 자신은 결코 정의가 아님을 깨닫고 인정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세상의 정의를 지키기 위해 내 자신이 반드시 ‘정의의 기준’이 될 필요는 없다. 아니 오히려 이런 유혹에서 스스로 벗어나는 것이야 말로 세상의 정의를 위한 더 옳은 방법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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