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오후 6시. 8시간의 강의가 끝나자 몸이 후줄근해진다. 발바닥이 얼얼하다. 수강생들이 돌아가고 잠시 의자에 몸을 쉬려하다가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단축번호 3번을 눌러 큰며느리에게 전화를 했다. '우리집 희망'이 나타난다. 둘째 며느리는 '우리집 보물'로 입력되어 있다. 손녀딸 민경이를 바꾸어 달래서 할머니와 놀기를 청한다. 기꺼이 내게 오겠다는 손녀딸의 말을 듣자 모든 감각이 새로 맞춘 듯 다시 일어선다. 큰 아들네 아파트 정문에서 손녀딸을 인수 받으며 이만 원을 건넨다. '내가 애 봐 줄 테니 니들 부부 영화나 한편 보라' 고 생색냈지만 사실은 애를 내게 보내주어 고맙다는 표시다. 손녀딸과 동네 목욕탕으로 향한다.

이미 여러 번 나와 함께 목욕탕에 온 민경이는 신발장에 신발을 넣고 열쇠를 뽑아 옷장 문을 열고 하나씩 옷을 벗어 옷장에 던진다. 천천히 옷을 벗어야 한다는 것을 안다. 민경이가옷을 다 벗기를 기다려 나도 마지막 걸친 것을 벗는다. '일등'으로 옷을 벗었다며 코를 실룩이고 좋아하는 아이 뒤를 따라 탕안 으로 들어간다. 샤워를 한 후 따듯한 물에 들어간다. 물이 아이의 어깨까지 찬다. 물에 뜰 듯 가벼운 아이의 손이 내 손을 꼭 잡는다. 손을 잡아당기자 아이의 몸이 공중으로 쉽게 끌어 올려진다. 까르르까르르 웃으며 동작을 반복한다. 그걸 부력의 힘이라고 어떻게 설명할까 하다가 그만 두었다. 민경이가 먼저 '할머니 내 몸이 가벼워 졌어요' 그런다. 물속에서 내 무릎에 껑충껑충 뛰어 오르면서 또 웃는다. '왜 이렇게 가벼워 졌지?.' 묻기만 했다. 언젠가는 아이가 내게 설명할 것이라 믿는다. 샴푸를 덜어 머리에 묻히고는 엉덩이를 흔들며 춤을 추었다. 벌거벗은 아주머니가 혼자서 그랬다면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민경이도 마주서서 머리칼에 샴푸를 비비면서 엉덩이를 흔든다. 눈에 비눗물이 들어가면 짜증이 날만도 할 텐데 춤을 추다보니 잊어버렸는지 한쪽 눈을 감은 채 춤을 추며 까분다. 그런 우리들의 모습을 힐긋 바라보는 사람에게 웃어준다. 수건을 바닥에 깔고 아이를 뉜다. 거품 낸 손으로 아이 몸을 어루만지며 예쁘다는 말을 수도 없이 한다. 팔도 예쁘고, 다리도 예쁘고, 귀도 예쁘고, 배도 예쁘고, 손이 닿는 곳마다 기도 하듯이 축복의 말을 해준다. 다섯 살 작은 손이 내 등을 간지러준다. '아쿠구 시원해라' 그쯤 되면 일주일간의 피로가 완전히 날아간다. 목욕용품을 하나하나 정리하게 한다. 제 몸보다 커다란 어린이용 목욕통을 끌어다 제자리에 놓는다. 의자도 바가지도 모두 제 자리에 놓는 아이에게 동네 어른이 칭찬의 말을 건넨다. 민경이가 또 으쓱하며 웃는다. 칭찬을 해준 어른에게 감사하다. 나는 민경이 에게 눈 맞추며 살짝 윙크했다. 민경이도 윙크하더니 초코우유가 먹고 싶단다. 거절하면 안 된다는 걸 안다. 그걸 강화라고 하던가.

둘이 먹을 요량으로 자장면을 한 그릇을 시켰다. 목욕하느라 배가 많이 고팠는지 제가 한 그릇을 다 먹겠다고 한다. 먹는 모습도 예술이다. 그래서 고슴도치도 제 새끼 털을 부드럽다고 한다는 말이 있다던가. 손녀딸 입술에 묻은 검은 자장이 거품커피가 묻은 스타의 입술처럼 보인다. 제 어미젖만 먹던 아이가 처음으로 밥풀을 입에 넣고 오물거릴 때, 얼마나 가슴 벅차게 대견했던가. 포크에 자장면을 돌돌 말아 한 가닥도 흘리지 않고 입에 넣는 모습을 마냥 쳐다보다 내 밥 먹는 것도 잊었다.

우리 집에는 민경이 그림첩이 있다. 예쁜 언니를 그려주면 그곳에 색칠을 하는 데 주문이 만만치 않다. 같이 그림을 그려가며 까르르 웃다가도 내가 그려준 밑그림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금방 굵은 눈물을 흘리며 흐느낀다. 볼수록 신기하다. 눈물이 뚝뚝 떨어지다가도 마음에 드는 그림을 그려주면 바로 눈물위에 웃음꽃이 활짝 핀다. 늦은 밤 행복에 겨워 가물가물 나른해지는 내 귀에 민경이 노래 소리가 새소리처럼 어여쁘다. 할머니 재워준다며 부르는 노랫소리에 아이보다 먼저 잠드는 내가 염치없지만 더 이상 행복할 수는 없다. 꽃이다. 꽃 중의 꽃이다 사람은.



/유인순 한국문인협회 천안지부장






저작권자 © 충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