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시평] 김윤희 수필가·전 진천군의원

올해로 광복 76주년을 맞는다. 8월이면 늘 떠오르는 인물이 있다. 진천이 낳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요. 교육자인 보재 이상설 선생이다. 또 한사람을 꼽는다면 선생의 사촌 이상직이다.

이상직은 보재 선생이 양자로 간 동부승지 이용우의 동생 이상우의 아들이다. 보재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보재 선생이 1906년 중국 용정에 항일민족학교인 ‘서전서숙’을 세우고, 간도, 연해주를 비롯해 구미 각국을 넘나들며 독립운동을 벌인 반면, 이상직은 1905년 진천에 ‘상산보통학교’를 세우고 진천을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진천의 삼일만세운동을 주도한 인물이다.

그가 세운 ‘상산보통학교’는 1911년 ‘진천공립보통학교’로 교명은 바뀌었지만, 그의 항일정신은 고스란히 살아 학생들에게 전해지고 있음을 느낄 수 있는 사건이 발생했다. 1926년 4월, 진천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이 일본인의 부당성에 동맹휴학과 일본인 상점의 상품 불매운동으로 항거한 이야기다.

발단은 5학년 남자반의 정 모 학생이 학교 앞에 있는 일본인 ‘입강’의 상점에서 정구용 공 1개를 터트렸다는 이유로 감금된 일에서 비롯된다. 그날 첫 시간 수업에 정 모 군이 등교하지 못해 결석 처리되자, 한 친구가 정 군의 감금 사실을 알렸다. 이에 격분한 학생들이 수업 시간이 끝나자 긴급 학급회의를 열고 동맹휴학과 동시 일본인 상점의 상품 불매운동을 결의하였다.

‘입강’은 기미 만세운동 당시 광혜원 헌병대 분헌 소장으로 있으면서 광혜원 만세 사건 때 마구 총포를 발사하여 많은 사상자를 낸 악질적인 일본인이다. 어린 학생들이지만 민족 감정이 솟구쳐 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고 다시는 일본인들이 만행을 저지르지 않도록 경고하기 위한 것이었다.

사건이 터지나 당시 급장이었던 임상철과 정운갑, 이호영 등이 주동자로 경찰에 연행되어 문초를 당하였다. 이 사실은 삽시간에 전교로 퍼졌고, 입강의 상점은 물론 읍내의 모든 일본인 상점의 상품 불매운동으로 확대되었다.

일본 경찰에서는 입강이 한국인들에게 악질적인 폭행을 저질렀기 때문에 좋지 않은 인식을 받고 있다는 점과 상대가 16세 이하의 청소년이란 점을 들어 사건 3일 만에 무마 시켰다. 그러나 더 큰 이유는 3.1운동이 지난 지 얼마 안 되는 때에 또다시 민족적 사건으로 확대될 것을 우려한 것이다.

비록 어린 학생들이었지만, 일본인의 부당성에 항거하는 민족정신이 살아 있음을 보여준 사건으로 군지에 기록되어 있다. 이상설과 함께 독립운동을 전개한 이상직의 깨어있는 항일정신의 영향이라 할 수 있다.

한편, 보재 선생은 전 재산을 팔아 독립운동에 몸 바쳐 활동하는 동안 부인과 자녀들의 삶은 일본의 혹독한 감시아래 매우 피폐했다. 선생에게는 아들 정희와 갑희, 가희 두 딸이 있었다. 정희는 재준(재명), 재홍, 재철 세 아들을 두었다. 재준은 상산보통학교와 중앙중학을 졸업하고 진천양조장에서 일을 보기도 했는데 신병으로 향년 50에 별세했고, 재홍, 재철은 6. 25전쟁 때 행방불명된 것으로 알려졌다. 부인 역시 선생이 순국 후 잠시 진천으로 내려왔으나 여의치 못해 다시 서울로 가 광복을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유족으로 둘째딸 가희의 차녀 현원이 가끔 보재 선생의 행사에 참여하고 있을 뿐이다. 자꾸 잊혀져가는 독립운동가들 그 가족들의 삶이 눈 시린 8월, 눈부신 햇살이 야속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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