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시평] 김윤희 수필가·전 진천군의원

이제 곧 추석이다. 코로나19 확산세는 여전히 기세등등하다. 정부는 연일 거리두기를 당부하며 가급적 타 지역 방문을 자제해 달라 요청한다. 고유의 명절 분위기가 주춤해지고, 점점 습속의 양태가 달라져가고 있다. 우리의 정(情)문화, 인간미마저 사라질 것 같은 위기감이 든다.

올여름 더위 또한 유난히 길고 뜨거웠다. 하지만 그 속에서 알곡들은 누릇누릇 가을을 여물리고 있다. 추석도 어김없이 코앞으로 다가 왔다. 자연의 섭리는 누구도 막을 수 없는 모양이다. 간혹 자연 재해라는 이름으로 사람이 혹독한 시련을 겪을 때도 있지만, 이는 자연의 이치를 거스르지 말라는 일종의 경고일지도 모른다.

하루 종일 컴퓨터를 끼고 있다 보니 온 몸이 찌뿌둥하다. 신체기능이 제대로 작동을 하지 않는 거다. 정지되어 있는 기능이 반란을 일으키는가 보다. 좀 움직여 달라 한다. 사람 편의를 위해 발명한 기계에 발목을 잡혀 부림을 당하고 있음을 문득 깨닫는다. 우리 인간이 어떻게 살아왔던가.

컴퓨터 전원 스위치를 끄고 밖으로 나섰다. 한층 높아진 하늘, 따끈한 햇살이 청량감을 준다. 오일장으로 발길을 잡았다. 몇몇 잠자기가 머리 위를 빙빙 돌며 동행을 자처한다. 반갑다.

진천은 5일, 10일 단위로 장이 선다. 추석을 앞두고 마지막 열리는 장, 대목장이다. 풍성하다. 북적북적 생기가 넘친다. 비록 외계인처럼 마스크를 쓰고는 있지만 사람의 체온이 흐르고 있음을 느낀다. 사람살이의 맛과 정이 느껴지는 곳이다. 오일장은 각종 푸성귀와 곡물 등 먹거리가 주인공 노릇을 해 왔다. 하지만 명절 대목장은 알록달록 화사한 옷가게, 신발가게가 더 눈길을 끈다. 아직은 ‘설빔’ ‘추석빔’의 정서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명절에 옷 한 벌, 고무신 한 켤레라도 얻어 신으면 더없이 행복한 명절이 아니었던가.

얼마 전에 문우로부터 고무신, 그것도 깜장 고무신을 선물 받았다. 신발 앞발부리에 꽃그림이 곱게 그려진 것이다. 어린 시절 한 조각을 돌려받은 양 반갑고 정겨웠다. 발 사이즈에 딱 맞기는 하지만 신을 것으로는 생각 못했다. 그냥 기념으로 신발장에 모셔 두고 가끔 흐뭇이 바라보던 터였다.

늦여름 어느 비오는 날, 운동화는 흠뻑 젖고, 가죽구두를 신기도 망설여지기에 신발장을 둘러 보다 검정고무신을 꺼내 신고 출근을 했다. 원피스와 꽃그림이 그려진 고무신이 생각보다 잘 어울렸다. 우산을 쓰고 맨발로 고무신을 신고 자박자박 걷는 발길이 상쾌했다. 비오는 날 안성맞춤이다.

그 뒤로 햇볕이 짱짱한 날에도 종종 고무신을 꺼내 신는다. 처음에는 뒤축이 납작하여 뒤로 넘어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수십 년 구두에 길들여진 발도 이게 뭔가 어색해 하더니 곧 받아들인다. 보는 사람들도 단화인줄 알았다며 잘 어울린다. 예쁘다하며 옛 친구를 만난 듯 반긴다.

어린 시절 가난의 상징처럼 벗어나고 싶어 했던 고무신이 이렇게 정감이 가는 것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가. 물질적으로 풍요롭다하여 행복지수가 높아지는 것은 아닌 게다. 그럼에도 우리는 왜 그리 물질에 연연해하는 것인지.

오일장에 가보면 사람살이의 근본을 생각하게 된다. 금전이 오가고 이익을 따져 흥정을 해도 삭막해 보이지 않는다. 정겨움이 느껴진다. 설빔, 추석빔 하나에 세상을 다 얻은 듯 행복해 하던 시절이 그립다. 검정고무신으로 배를 만들어 띄우고, 신발짝 벗어 올갱이 잡으며 자연과 벗 삼던 흑백 사진 속 풍경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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