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웅칼럼] 김진웅 수필가

월요일마다 친구들과 함께 산행을 하다가 코로나19 때문에 부득이 중단되었다. 무려 일 년 이 개월여 만에 산행 모임에서 가을 산에 오른다고 생각하니 가슴 설렌다. 마치 학생들이 소풍 가기 전날의 심정 같다. 등화가친(燈火可親) 계절에 책을 펼치고 몇 장 읽자니 언제 그려놓았는지 가을 산 삽화가 아른거리며 얼른 가자고 유혹한다. 위드 코로나(With Corona) 첫날, 억새와 단풍이 손짓하는 구룡산으로 향하니 가로수 은행잎도 노란 나비 떼가 되어 동행하여 주어 발걸음이 한결 가볍다.

산기슭 오솔길에 들어서니 이웃 할머니 같은 억새가 하얀 꽃이 되어 한들한들 반겨주고, 가랑잎들이 포르르- 포르르- 머리 위로 날아다닌다. 며칠 전에 내린 비로 서둘러 내려왔는지 성미 급한 낙엽은 어느새 뿌리를 감싸고 있다.

산마루에 오르니 만산홍엽(滿山紅葉)으로 자태를 자랑하는 가을 산이 경이롭다. 대자연의 위대한 힘이 아니고는 꿈도 못 꿀 아름다운 한 폭의 수채화이다. 여름내 내린 폭우와 사람들의 발길에 패여 앙상하게 드러낸 뿌리가 안타까워 덮어주는지, 눈보라 칠 삭풍에 따뜻하게 해주려고 따사로운 엄마 품처럼 감싸주고 있다. 또한 한 해 두 해 지나면 온몸을 바쳐 거름이 되어 초목들이 자랄 수 있게 하는 낙엽 또한 위대하다. 마치 제 몸을 녹여 어둠을 밝혀주는 촛불처럼 숭고하고 엄숙한 낙엽이다.

‘밤과 도토리를 줍지 맙시다. 밤과 도토리는 산짐승의 먹이입니다.’란 펼침막은 몇 달 동안 밤잠도 제대로 못 자며 산을 지키다 지쳤는지 희뿌옇게 바래어 안쓰럽기 짝이 없다. 바스락거리는 가랑잎은 도토리와 열매들을 숨겨두었다가 산짐승들의 겨울 양식이 되게 하는데, 금년에는 도토리도 무척 귀하다니 짐승들이 춥고 긴 겨울을 어떻게 이길까 걱정된다. 또한 도심까지 내려와 공격하기도 하는 멧돼지가 올겨울에는 더 극성을 부리지나 않을까 우려된다. 몇십 년 전만 해도 땔나무가 모자라 가랑잎과 솔잎들을 긁어서 땔감으로 썼던 때를 생각하면 옛날이야기만 같다. 지금은 간벌한 나무들까지 여기저기서 그냥 썩어가고 있는 것을 생각하면 격세지감마저 든다.

머지않아 나목(裸木)이 될 가을 산을 보니 우리네 인생도 나무와 많이도 닮았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계절이 바뀌듯 쉼 없이 변주(變奏)되는 우리의 삶들이 있다. 때로는 다람쥐 쳇바퀴 도는 듯한 생활이지만,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일생인데 평균 수명은 점차 높아지는 것을 말해주듯 80대 이상 어르신들이 많다. 2020년 12월 1일에 통계청이 발표한 2019년 생명표에서는 한국의 기대수명은 83.3세이다.

기대 수명을 대략 80살로 보고 자연처럼 4계절로 나누어 본다면 20살까지는 봄, 40살까지는 여름, 60살까지는 가을, 80살까지를 겨울이라 여긴다면 나는 지금 어느 계절인가 숙연해진다. 시간의 소중함을 거듭 느끼고 인생무상(人生無常)이란 상념에 잠기기도 한다. 마음에 수많은 집을 짓고, 방을 다 채우기도 전에 허물고, 때로는 모래 위에 화려한 성을 쌓고 화려한 자아도취감에 빠지지 않았는지. 크고 작은 세상사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초지일관으로 중심을 잡고 소처럼 우직하게 걸어나가야 하는데…….

가을엔 수확의 기쁨으로 여유롭고 넉넉해지고, 아름다운 단풍이 산하를 수놓듯 우리 인생 또한 열심히 농사지었다면 많든 적든 거둬들인 곳간의 양식에 만족할 줄도 알아야 한다. 겨울나무처럼 마음을 비울 줄도 알고, 여름의 푸르렀던 신록과 가을의 아름답던 단풍을 내려놓고 앙상하게 버틸 나무처럼 욕심을 줄이고, 의연하게 살아가라고. 사색의 계절 가을철에 더욱 바른 인성과 감성을 기르고, 삶의 질과 행복감을 높이라고 울긋불긋한 고운 옷을 입고 있는 가을 산이 속삭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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