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논단] 황종환 중국 칭화대학 한국캠퍼스 교수·한국자산관리방송 논설실장

이제 완연한 가을의 끝자락이다. 아침저녁으로 제법 차가운 바람이 불어온다. 단순히 계절이 바뀌는 것뿐만 아니라 또 다른 무엇인지 모를 변화의 물결이 가까이 다가오는 느낌이다. 가을이 지나가고 겨울이 오는 시점은 말로 형언하기 어려운 적막함과 고요함이 함께 찾아오는 순간이다. 아마도 선선한 가을바람에 비해 다소 싸늘하게 느껴지는 날씨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러다가 본격적인 매서운 추위를 동반하고 찾아오는 한겨울을 과연 어떤 기분으로 맞이하게 될지 궁금하다. 떠나가는 가을을 그냥 보내기가 너무 아쉬워 몸부림치지만 소리 없이 시간은 마냥 흘러간다.

정말 사계절의 모습은 대자연의 섭리 가운데 신비롭고 다양한 색깔을 보여준다. 추위를 이겨내고 솟아난 화려하고 아름다운 꽃, 녹음으로 덮인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는 선명한 하늘, 투박한 듯 섬세하고 화려하게 물든 단풍, 적막한 외로움을 느끼게 하는 하얀 설경이 계절의 순환을 반복적으로 보여준다. 올해는 예년처럼 단풍이 제대로 들지 않을 것이라는 보도가 있었다. 하지만 숲은 저마다의 각양각색 단풍으로 물들어 최상의 자태를 발산하며 산자락을 가득 채웠다. 울긋불긋 여러 가지 색깔로 물들어진 단풍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자연스레 세월의 무상함에 빠져드는 기분이다.

사람은 대체로 의식적인 판단으로 실행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습관에 따라 무의식적으로 행동한다. 그래서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속담이 있지 않을까 싶다. 처음부터 좋은 태도를 가져야 한다는 가르침으로 성장 초기부터 교육과 습관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요즘 언론에 보도되는 일부 사회지도층과 정치인들의 언어습관을 보면 안타까운 모습이다. 누구라도 자신만의 생각이 마음에 꽂히면 아집에 빠져들 수밖에 없다. 좋은 습관을 가지려면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고 스스로를 절제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세상에서 당연하게 이루어지는 것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처음부터 숲이 우거진 산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미술계의 거장 미켈란젤로와 친구들의 일화다. 어느 날 미켈란젤로는 파티에 초청을 받게 되었다. 참석한 친구들은 시간가는 줄 모르고 다른 특정한 사람의 흉을 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는 아무런 말없이 묵묵히 친구들의 얘기를 듣고 나서 화폭에 흰 물감을 칠한 후 한 가운데에 까만 점 하나를 찍고 나서 그들에게 지금 무엇을 보고 있는지 물었다.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그야 물론 까만 점이지”라고 대답하였다. 그는 빙그레 웃으면서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그럴 줄 알았네. 나는 하얀 부분을 보고 있다네. 하지만 마음이 비뚤어진 사람은 넓은 하얀 부분을 보지 못한 채 작은 까만 부분만 보게 되지. 부정적으로 생각하면 깨끗한 마음도 부정적으로 변한다네. 심성이 곱지 못하게 되고 시야도 좁아져 매사 다른 사람의 좋은 면보다는 나쁜 면만 말하게 되지”라고 말하였다.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친구들은 남을 안주삼아 흉보았던 일을 매우 부끄러워했다고 한다.

요즘 자주 회자되는 말 중에 뭐 눈에는 뭐 밖에 안 보인다는 말이 있다. 남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의 눈에는 자신의 잘못과 단점은 보이지 않는다. 이 세상에 똑같이 생각하며 살아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각자 자기의 인식 영역만큼 생각하고 해석하면서 살아간다. 좁은 생각으로 좁은 세상을 보기보다는 넓은 마음으로 넓은 세상을 보는 것이 바람직하다. 좁은 생각이나 자기중심적인 삶의 자세는 결국 자기 발전의 걸림돌이 된다. 남을 헐뜯고 흉보는 것은 일시적으로 좋을지 모르나 나중에는 자신의 이미지가 덩달아 나빠진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내가 남의 흉을 보면 남도 나를 흉보게 되는 법이다. 세상의 모든 일은 상대적이다. 스스로 눈높이 사고를 가지고 자신만의 기준이 아닌 보다 객관적인 기준으로 세상을 바라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양재천변 산책길을 걸어가다가 떨어진 낙엽이 바람에 이리저리 나뒹구는 모습을 보면서 문득 상념에 빠져든다. 나뭇가지에 잎사귀가 이렇게 많이 달려 있었을까. 짊어진 무게에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웠을까. 시간이 흐르고 계절이 바뀌고 난 후 소리 없이 견뎌낸 무수한 세월이 지나갔음을 뒤늦게 문득 알아차린다. 세월이 흘러 떠나갈 때가 다가오니 나무는 아주 시원하게 벗어버린다. 치열했던 여름과 무성했던 가을이 지나가고 다가오는 겨울 앞에 무자비할 정도로 벗어버리고 결국 나목(裸木)이 된다. 나뭇가지에 매달려 흔들거리는 나뭇잎이나 바닥에 떨어져 흩날리는 낙엽은 세상적인 욕망에 사로잡힌 채 혼돈에 빠진 세상을 바로잡아주는 특별한 치료제다.

이제 각자 저마다의 가을이 서서히 깊어가고 있다. 가을 햇살 한나절이면 나락이 서 말이라고 한다. 세상에 없어서는 안 될 것들이 한둘일까 마는 햇살을 꼽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다. 햇살 한줌보다 푼돈 한 푼에 목을 매는 한없이 가벼운 존재로 살아가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햇살의 소중함과 가치를 조금이라도 소홀히 하고 싶지 않다. 세상은 밝은 곳과 어두운 곳, 높은 곳과 낮은 곳으로 나뉘어 있을지라도 햇살만큼은 공평하게 파고들어 골고루 물들게 한다. 삶은 자연의 질서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것일 뿐 크게 보면 별 게 아니다. 바람에 휘날리는 낙엽을 보고나서 부모님과 선배들의 침묵이 큰 감동이었음을 새삼 깨닫는다. 포근하게 비취는 늦가을 햇살이 가슴속 깊은 곳까지 물들인다. 순간 마음이 편안해지는 늦가을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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