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을 열며] 곽의영 전 충청대 교수 

어느새 10월을 지나 11월 중순을 넘어서고 있다. 그토록 화려하게 빛나던 가을도 그 빛을 잃고 떠나가고 있다. 이제 겨울도 머지않아 다시 돌아오고 또 한해를 마감하게 된다. 그래서인지 자꾸만 세월의 무게가 느껴진다.

도대체 시간이란 무엇이기에 이러는 걸까? 모름지기 인간은 누구나 시간과 더불어 살아가고 있다. 어쩌면 삶이 곧 시간이고 시간이 곧 삶이 아닐까 여겨진다.

그럼에도 우리는 시간의 흐름을 느끼면서도 그 근원(根源)을 잘 모르는 것 같다.

흔히들 시간을 그저 공기처럼 자연의 일부나 삶의 배경 정도로만 여기고 있으니 말이다.

시간에 대하여 고대(古代) 신학자이자 철학자인 성 어거스틴(St. Augustine)은 “나는 시간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그러나 누가 묻는다면 설명할 수 없다.”라 하였다.

어거스틴은 시간을 체계적(體系的)으로 사유(思惟)한 초유(初有)의 학자인데도 시간의 본질(本質)을 잘 모른다는 것이다.

어찌 보면 시간은 언어(言語)를 넘어서는 불가사의(不可思議)한 개념이다.

그러면 시간은 과연 무엇인가?

일반적으로 ‘시간(時間)이란 사물(事物)의 변화를 인식하기 위한 관념(觀念)’이다. 그러므로 ‘시간은 자연의 창조물이 아닌, 인간이 만들어낸 관념의 세계’이다.

사전적(事典的)으로 시간은 ‘과거, 현재, 미래로 이어져, 머무름이 없이 일정한 크기로 무한히 연속되는 흐름’이라 정의하고 있다.

어느 날 시간을 살피노라면 고대 그리스 신화(神話)가 떠오른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시간을 크로노스와 카이로스의 두 개념으로 인식하였다.

크로노스(Chronos)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태초신(太初神) 중의 하나로 ‘일반적 의미 의 시간’이다. 이러한 시간은 가만히 있어도 ‘단순히 흘러가는 자연적·물리적 시간’이다. 그래서 1년 365일, 하루 24시간 등 과 같은 그런 시간으로 수치(數値)를 통해 정량화(定量化)가 가능하다.

한편 카이로스(Kairos)는 그리스 제우스(zeus)신의 아들로, 기회의 신(神)이라 불리 운다. 카이로스는 다소 형이상학(形而上學的) 이해가 요구되는 개념으로, ‘의식적이고 주관적이며 논리적인 시간’이다. 즉 ‘공평하게 주어진 시간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시간’이다. 다시 말해 비록 시간은 흘러가더라도, 그런 시간에 특별한 의미가 주어지는 시간을 말한다.

이와 같이 크로노스가 모두에게 동일하게 적용되는 객관적(客觀的) 시간이라면, 카이로스는 사람들에게 각각 다르게 받아들이는 주관적(主觀的) 시간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카이로스는 ‘순간의 선택이 10년을 좌우 한다’는 1989년대의 광고 문구가 시사(示唆) 하듯이, 일상적으로 의미 없이 지나가는 크로노스 시간과는 질적(質的)으로 다른 시간이다.

무릇 시간을 크로노스로만 받아들이면, 시간의 노예가 되어 수동적으로 살아 갈 수 있다. ‘뭐하나 제대로 이룬 것 없이 나이만 먹었다’는 사람들은 여기에 속한다. 반면에 시간을 카이로스로 바라보면, 시간의 주인이 되어 능동적으로 살아갈 수가 있는 것이다.

요컨대 인생의 여정(旅程)에서, ‘시간을 어떻게 바라보며 사느냐’가 대단히 중요하다.아무래도 삶의 의미를 찾아서 새로운 가치를 담아내려면, 카이로스의 자세를 지녀야 한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마음으로 시간을 만들어 가는 사람들이 바로 이들이다.

흔히 사람들은 주어진 시간은 자의적(恣意的)으로 쓸 수가 있어, 자칫 크로노스의 시간을 소홀히 할 수 있다. 고로 크로노스에 머물지 말고 카이로스의 시간을 가져야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시간의 실체(實體)는, 시계와 같은 기계를 넘어서는 훨씬 거대(巨大)하고 추상적(抽象的)이다. 시간은 우주가 생긴 이래 계속 흐르고 있어 분절(分節)된 형태로 규정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인간은 유한(有限)한 존재이다. 언젠가 저 노을의 뒤안길로 떠나야 한다. 부디 영혼(靈魂)이 보다 성숙(成熟)해지고, 삶의 진정한 의미(意味)와 가치(價値)를 위해서는,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내부의 가치가 익어가도록 힘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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