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논단] 황종환 칭화대학 한국캠퍼스 교수· 한국자산관리방송 논설실장

새해가 시작된 지 엊그제 같은데 벌써 설날 연휴가 지나갔다. 세월의 흐름이 정말 장강의 유수처럼 빠르다는 사실을 요즘 실감하게 된다. 이제 명절을 맞이하는 기대감으로 설레는 마음이 별로 들지 않는다. 사람들이 기억하는 명절의 모습이 드문드문 보일 뿐 아쉽게도 본래 의미가 점차 퇴색되는 듯하다.

최근 코로나19 오미크론 변이 확산세가 급등하면서 신규 확진자수가 2만 명을 기록했다는 발표가 있다. 올해 설날도 온 가족이 함께 모여 보내기가 사실 쉽지 않았다. 가족들이 오순도순 정담을 나누며 가까운 친척을 찾아 세배를 드리는 풍습이 먼 옛날의 추억이 되어버렸다. 명절을 느끼는 기분이 예전처럼 신나는 일은 더 이상 아니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지난해 늦가을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창궐할 때 장모님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셨다. 평소 97세의 연세에도 일상생활을 혼자 하실 만큼 건강한 편이었다. 먼저 가신 남편 곁으로 빨리 가시고 싶었던지 노환으로 한 사나흘 쯤 병원에 계시다가 홀연히 떠나가셨다. 이삼 년 전만 해도 노화에 따라 별수 없이 잃어버린 미각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다소 짠 김장김치나 장아찌를 만들어 정성스럽게 보내주셨다. 더 이상 먹거리를 혼자 만들 수 없게 되었을 때 막내딸인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 김장은 했는지 어떻게 할 것인지 귀찮을 정도로 물어보시고는 하셨다. 아마 김장 김치를 먹지 못할까 봐서 먹고 싶은 걸 못 먹고 다닐까 봐서 걱정이 들었던 아닐까 싶다. 아무튼 뭐라도 해주고 싶어서 그냥 목소리를 듣고 싶으셨을 것이다.

이번 겨울에는 생전에 장모님께서 담아 보내주셨던 김장 김치 맛이 유난히 그리웠다. 얼마 전 장모님이 생전 살았던 지역에 일이 있어서 KTX역에 내렸을 때 갑자기 낯선 곳에 서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이곳에서 장모님이 기다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한동안 광장에 멍하니 서 있다가 역 앞에 있는 작고 아담한 식당을 찾았다. 늦은 점심식사를 하는데 문득 맞은편에 장모님이 앉아 계신 듯 착각마저 느껴졌다. 손님 없는 식당에 앉아 장모님이 만드신 음식을 더 이상 맛볼 수 없다는 생각에 어쩔 수 없이 후각으로 파고드는 고유의 향이 느껴졌다. 순간 코를 킁킁거리며 눈시울이 젖어드는 기분도 나름 괜찮았다.

이른 아침 창밖으로 바라보는 산 정상이 밤새 내린 눈으로 하얗게 뒤덮여 희뿌연 안개 속에 희미하다. 지금의 어려운 상황도 순백의 하얀 눈으로 덮여져 깨끗하게 정화되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한 그루 나무를 심고 물을 주며 향기로운 그늘을 키우는 사람이 있다. 꽃을 꺾어 창가에 놓지 않고 꽃씨를 뿌리며 그 꽃씨가 퍼져나가 세상을 물들이는 꿈을 꾸는 사람이 있다. 어느 시인의 시 일부 구절이다. 평소 집 뜰 구석구석에 사랑과 정성으로 나무와 화초들을 가꾸시던 어머니 모습이 그려진다. 아침에 해가 뜨고 저녁에 석양 노을이 지듯이 언젠가 인생의 종착점에 도착할 수밖에 없다. 어느 누구라도 피해갈 수 없는 하나의 진리다.

요즘에는 코로나19 바이러스나 초미세먼지가 심하여 특별한 일이 아니면 사람들을 만나거나 외출하기가 망설여진다. 올해로 백이세가 되신 노모를 찾아가는 일조차 여간 조심스러운 세상이 되었다. 약간의 치매 증상을 보이시지만 대체로 식사도 잘하시고 건강하신 편이라서 감사할 일이다. 가끔 찾아가는 아들을 잠시 쳐다보실 뿐 다시 지그시 눈을 감고 계신 모습이 꼭 어린아이 얼굴이다. 때로는 아들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하는지 오래전에 세상을 떠난 막내 외삼촌 이름을 부르시는 것을 보면 가슴이 찡하다.

젊은 시절 기억되는 어머니 손맛은 소박하지만 담백하고 시원한 느낌이었다. 갑자기 집에 들를 때면 밥그릇 가득 채운 따뜻한 쌀밥에 콩나물국이나 김칫국을 끓여 맛있는 밥상을 차려주셨다. 행여나 끼니를 거르고 다니지는 것은 아닐까 많이 걱정하셨던 것 같다. 연세가 드신 후에는 입에 간이 맞지 않는지 대체로 음식 맛이 짜고 매워 예전의 맛이 사라졌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어머니가 만드신 음식은 그냥 음식이 아니라 사랑이다. 지금은 음식을 만들지 못할 뿐만 아니라 제때 식사시간을 모르는지 밥을 먹었는지 조차 여쭈시지 않는다. 단지 조금만 어두워지면 잠을 자고가라는 말씀만 하실 뿐이다. 자식의 입장에서는 어머니 손맛이 세상에서 가장 맛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당연하다.

설날 연휴에 어머니를 찾아뵙고 가족들과 휴가를 떠나는 마음이 편안해서인지 살포시 입가에 미소가 지어진다. 주변 산자락에 서 있는 나뭇가지가 바람에 나부끼며 반갑게 손을 흔들어준다. 도로변 마을 굴뚝에서 모락모락 피어나는 연기가 눈 덮인 산자락과 어우러져 풍경화처럼 아름다운 겨울의 모습이다. 순간 어머니가 해주셨던 쌀밥에 따뜻한 콩나물국이 갑자기 그리워진다. 세상은 변할지라도 어머니의 손맛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 나무에 물을 주고 꽃씨를 뿌리는 사람이 바로 자식을 사랑과 정성으로 키워준 어머니가 아닐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은 어머니의 얼굴이며, 세상에서 가장 빛나는 별은 어머니의 마음이다.

코로나19 사태가 장기화되면서 사람들이 부딪치는 현실은 더욱 힘들어지고 마음은 조급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인생의 여행길에서 겪게 되는 고난은 잠시 쉬어가라고 주어지는 축복이라는 말이 있다. 잠시 멈출 줄 알아야 비로소 인생의 진정한 아름다움과 행복을 바라볼 수 있는 법이다. 인생을 바꾸려고 하지 말고 인생을 바라보는 관점을 바꾸라는 말이 가슴에 와 닿는 순간이다. 주어진 삶의 관점을 조금만 바꾸어도 나름 여유로워지고 편안해질 수 있다. 차창을 스치듯 지나가는 풍경도 멈춰 서서 바라보았을 때 아름답게 보이듯 삶도 마찬가지다. 세상의 문을 열고 새해의 첫 마음 한 발 그리고 첫 발자국 한 걸음을 당당하게 내딛는 음력 정월 초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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