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을 열며] 곽의영 전 충청대 교수 

이 세상에서 아무리 기술이 발전하고 시대가 변해도, 변하지 않는 것이 인간의 본질이다. 죽음과 삶, 선과 악, 고통과 번민, 종교와 사랑 등은 인간이기에, 필연적으로 경험할 수밖에 없는 요소들이다.

고전은 바로 이러한 인간의 본질에 대해, 질문하고 사유(思惟)하여 통찰(洞察)을 이끌어 낸다. 그리하여 고대와 현대를 꿰뚫는 그 어떤 생명력으로, 우리들에게 특별한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따라서 고전은 고유의 영속적·보편적 가치가 있어, 시간의 흐름 속에서 소진(消盡) 되지 않는다.

이것이 진정으로 고전과 마주하는 기본적 이유이다.

그러면 고전이란 무엇을 뜻하는가?

일반적으로 고전(古典)은 ‘시대를 뛰어 넘어 변함없이 가치를 지닌 전범(典範)’으로, 여기에는 문학뿐만 아니라 예술, 사상, 제도 등 모든 문화 현상이 포괄 된다.

오늘날 과학과 기술의 눈부신 발전에 의해, 우리의 삶은 물질적으로 풍요롭고 편리해지고 있다. 하지만 과학·기술의 유토피아가 우리 삶의 궁극적인 목적은 아니다.

그러기에 인간과 세계에 대한 질문은 어느 시대에도 던져지는 명제(命題)들이다.

로마 제국의 제16대 황제이자 스토아 철학자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는 그의 ‘명상록’에서 다음과 같이 질문한다.

죽음은 무엇이고 그 대척점(對蹠點)으로서의 삶은 무엇인가? 삶에서 필연(必然)은 무엇이고 우연(偶然)은 무엇인가? 그리고 행복은 무엇이며 나는 누구인가? 라고 말이다.

하긴 이러한 물음은 누구라도 한 번쯤 떠올려 보았을 것이다.

전국시대(戰國時代)의 사상가 장자(莊子)는 인간의 삶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장자(莊子)는 도(道)를 천지 만물의 근본 원리로 삼아, 욕심을 버리고 주어진 대로 자연스럽게 행하라 하였다. 이는 마치 물고기가 물속에 있을 때 저항 없이 살듯이, 사람은 도(道)를 우주의 본체로 삼고 속세를 초탈(超脫)하여, 유유자적(悠悠自適)하게 살라는 의미이다.

그러니까 장자(莊子)는 인간을 속박하는 그 어떤 것도 있지 않은 이른바 ‘무위(無爲)의 삶’을 꿈꾸었던 것이다.

다음으로 프랑스 소설가 알베르 카뮈(Albert Camus)의 ‘페스트’에 관한 이야기이다.

카뮈의 ‘페스트’는 알제리의 작은 마을에 창궐했던 전염병 ‘페스트’와의 힘겨운 싸움과 끝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 나오는 ‘페스트’란 하나의 상징으로 본다. 이는 어쩌면 우리 인간 내면의 악일수도 있으며, 기본적인 심성일 수도 있다.

때문에 이 페스트들은 어떤 형태로든 계속 우리 안에 살고 있으며, 이를 막는 길은 공동체적 연대와 연합의 힘이라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코로나19’로 온 인류가 고통 받는 이 시대에, 사람들이 카뮈의 고전 ‘페스트’를 읽는 지도 모른다.

역사적으로 이 ‘페스트’는 70여 년 전 세상의 이야기다. 그런데도 왠지 지금의 ‘코로나 19) 상황과 너무나도 닮아 보인다. 그렇다. 당시에 힘겨운 노력 끝에 ‘페스트’가 종식되어 평화가 찾아왔듯이 오늘의 ‘코로나’ 팬데믹(pandemic) 현상도 전 인류가 서로 지혜와 힘을 모은다면, 머지않아 정복될 것이다.

아무튼 고전은 시간의 흐름을 거스르고 지금까지 살아 숨 쉬는 소중한 결정체(結晶體)들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고전을 가까이 하지 않는다. 이를 두고 미국의 작가 마크 트웨인(Mark Twain)은 “고전이란 누구나 읽어 두어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읽고 싶은 생각이 없는 그런 것이다.”라 하였다. 하긴 아주 오래 전의 것이라서 그 뜻을 온전히 읽기가 불편하고 어려운 것은 사실이다. 고로 이를 극복하고 고전과 친숙해지려면, 고전과 우리 사이를 연결하는 매개체가 필요하다. 그 하나가 당시의 시대적 배경과 내용을 보다 쉽게 풀어주는 작업이다.

요컨대 시공을 초월한 고전을 읽고 감상하면, 그 속에서 삶의 지혜를 새롭게 발견하고 자신의 길을 잃지 않도록 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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