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단상] 윤한솔 홍익불교대학 철학교수 

일흔을 훨씬 넘긴 그 분은 매일 아침 산책을 한다. 키는 작은 편이고 항상 어린이 얼굴을 하고 얼굴에 미소를 띠지 않는다. 그것은 사람이 싫어서가 아니라 과묵한 성미여서 그렇게 할 뿐이다.

그 분의 속은 어느 누구보다 다정다감하고 깊고 넓다는 것을 그 분의 그림을 보면 안다. 엽서 할 장 넓이의 그림 값이 수 백 만원 하는 그림을 창작하는 화가인 그 분은 그러한 내색을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냥 보아선 그 분이 그렇게 훌륭한 화가라는 것을 알 수 없을 만큼 검소하고 겸허하게 살아간다. 그 분은 호화 별장이나 작업실을 짓기 위하여 그림을 그려 판 적이 없다. 다만 생활에 필요한 만큼, 그림을 그리기 위한 재료를 구입할 만큼, 그리고 완전한 비밀로 되어 있는 하나의 목적을 위하여 그림을 내놓는다.

그 분의 비밀은 몇 사람만 겨우 알고 있는 실정이다. 살아있는 동안 어느 누구도 이 일을 알아서는 안 된다는 단서가 붙어 있다. 몇 십 명의 학생이 혜택을 받는지 그 분은 모른다. 그리고 혜택을 받는 학생이 누구누구 인지도 모른다. 자기는 그림쟁이 이니까 그림만 그리면 되고 학생은 공부만 하면 된다. 그 분은 다만 돈이 없어서 고생하며 공부하는 학생을 소문 없이 도와주면 그만이다. 아마도 그 분은 그러한 생각으로 계시는 모양이다.

매일 열심히 작업을 하면서도 지칠 줄 모른다. 그 분의 창조력은 나이에 구애를 받지 않는 모양 같다. 그러한 은혜에 대한 보답으로 그 분은 이름도 알지 못하는 어느 학생들의 학업에 보탬을 주었으면 하는 소망을 남모르게 가슴속에 간직하고 있을 뿐이다.

그렇게 장학 사업을 해온지 벌써 십년이 훨씬 넘었다. 그저 그림이 팔리면 약간의 생활비와 필요한 경비를 떼어놓고 전액을 약속된 어느 구좌에 넣는다. 한 학기 동안 그렇게 모아 두었다가 등록할 때가 되면 가난하지만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실질적인 학자금이 되게 나누어 준다. 그러한 일도 아주 비밀로 한다. 그 분은 주는 자는 받는 자를 모르고 받는 자는 주는 자를 모르게 하도록 중간에서 돕는 사람에게 신신 당부를 할 뿐이다. 이렇게 장학금을 모아 공부하는 학생에게 나누어 주는 그 분의 이름을 밝힐 수는 없다. 영원히 밝혀지지 않기를 그 분은 바라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분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바보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도깨비 같다고 해야 할까? 아마 그렇게 생각하자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좋은 일을 한번 하면 솜사탕만큼 불려서 알려지기를 원하는 세상이고, 허영과 허세를 과시하면서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기를 좋아하는 세상이므로 아마도 그 분은 바보처럼 보일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러한 분은 덕이 없는 이 세상에 덕을 실천하고 있는 분이다.

덕이란 무엇인가? 남을 위하여 남모르게 흘리는 땀인 것이다. 왜 사람들은 선악의 틈바구니에서 몸살을 앓는가? 덕과 무덕 사이에서 신음하는 까닭이다. 왜 정치는 썩어나고 사회는 타락하고 인간은 방탕하는가? 마음이 덕을 잃고 행동이 덕을 잃은 탓이다. 부모와 자식 사이에서 가장 큰 덕은 효를 통해서 나타난다. 그리고 교육은 나라의 등불이다. 교육이 없는 나라는 어두운 밤길과 같다. 교육은 광명이요 등불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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