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단상] 이동규 청주순복음교회 담임목사

어느 날 베드로가 기도를 하는데 환상 중에 하늘에서 보자기 같은 것이 내려왔는데 그 안에는 여러 동물과 곤충과 새들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는 하늘로부터 ‘잡아 먹으라’는 소리가 들렸다. 베드로가 가만 보니 그것들은 모두 모세의 율법이 ‘부정한 것’으로 분류하는 짐승들로 이스라엘 민족은 결코 그러한 짐승을 먹지 않았다.

그래서 베드로는 자신도 어렸을 때부터 결코 부정한 동물을 먹은 적이 없으니 이번에도 이 짐승들을 잡아 먹을 수 없다고 대답한다.

그런데 또 다시 하늘에 소리가 들렸다.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행 10:15)

베드로는 이 환상의 의미가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했다. 그리고 그 순간 로마 백부장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베드로를 찾아왔다. 그들은 자신의 주인이 비록 로마인이지만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신실한 신앙인이라고 소개한다. 그리고는 자신들이 천사의 지시를 받아 베드로를 초청하라는 지시를 받았다는 것이다.

그때까지 유대인들은 이방 민족을 할례받지 못한 사람들이라 부르며 그들과 결코 어울리려 하지 않았다. 이방인들은 모두 부정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들과 함께 하는 사람도 결국 부정한 사람이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베드로는 자신이 경험한 환상을 통해서 하나님이 자신을 고넬료의 집으로 보내려 하신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의 집에 가서 복음을 전하고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그러했듯이 고넬료의 가정에도 하나님의 성령이 임했다.

그 모습을 본 베드로는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행 10:34-35)

본래 모세의 율법이 정한 것과 부정한 것을 구별한 이유는 이 둘의 분리가 서로에게 유익하기 때문이었다. 부정한 사람으로 분류가 되는 경우는 대부분 전염성이 있는 질병에 걸렸거나 혹은 출산이나 유출병과 같이 외부로부터 쉽게 감염이 될 위험에 노출된 사람들이었다.

따라서 이런 경우 그들을 ‘부정하다’라고 판단을 하여 다른 사람들과 분리시키는 이유는 그들이 다른 사람들을 감염시키거나 그 반대로 다른 이들로 인해서 감염이 되는 것을 막고자 하는 것이었다.

즉 성경이 말하는 정한 것과 부정한 것의 구별은 옳고 그름의 기준을 정하기 위함이 아니라 정한 사람이나 부정한 사람이나 모두를 위험으로부터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

오늘날 우리는 코로나로 인해 이와 같은 일들을 직접 경험하고 있다. 코로나에 걸린 사람은 성경이 말하는 부정한 사람과 같이 타인과 분리된다. 하지만 이는 코로나에 걸렸으니 그를 죽음으로 내몰기 위함이 아니다. 병에 걸린 사람이나 그렇지 않은 사람이나 모두가 안전하고 건강한 상태를 계속해서 유지시키기 위한 조치인 것이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거룩하고 깨끗한 사람들과만 함께 하시지 않으셨다. 오히려 그 반대로 죄인과 병자들과 함께 하셨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런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서는 결코 하나님의 아들일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예수님은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막 2:17) 말씀하신다.

우리는 때로 나와 성격이 다른 사람, 성향이 다른 사람, 습관이 다른 사람, 혹은 생김새가 다른 사람들을 보면서 그들을 마치 부정한 사람이나 죄인으로 취급하지는 않는가!

다르다는 것은 그 자체로 ‘틀린 것, 잘못된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런 다양성들이 인류의 정치, 문화, 경제 발전에 가장 큰 토대인 것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것이다.

존 스튜어트 밀은 자신의 저서 ‘자유론’에서 이와 같은 다양성의 가치를 강조한다. 참된 자유는 획일화를 통해서가 아니라 나와 다른 사람들을 얼마나 이해하고 포용할 수 있는가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지금 나는 나와 다른 이들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 정함과 부정함 모두가 함께 공존하는 세상을 꿈꾸는가? 아니면 어느 한 편이 다른 한 편을 정복하는 세상을 꿈꾸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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