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칼럼] 한옥자 수필가

베란다에서 손을 내밀면 나무가 곧 닿을 것 같다. 그것에 마음을 뺏겨 망설임 없이 이 집을 선택했다. 봄이 되면 은행잎 움트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벚꽃, 앵두꽃, 살구꽃, 명자나무꽃, 감나무꽃이 차례로 필 때면 들리지 않는 새 생명의 소리를 듣느라 세상의 잡음과 잠시나마 멀어진다.

그러나 두 해째 살아보니 햇볕이 야박해 아쉽다. 나무숲에 마음을 주느라 숲 옆의 거대한 아파트 숲을 간과해 시간대를 잘 맞추지 않으면 빛과 조우하기가 어렵다.

겨울의 끝에 만난 빈 나무숲 덕분에 가슴으로 성큼 봄이 들어선다. 숲이 비어 있어서 얻는 기쁨이다. 이런 날에는 음악이 제격이라 블루투스 스피커를 켠다. 좋아하는 커피 향과 음전한 빛과 음악의 어울림이 멋지다. 이왕이면 클래식을 듣고 싶어 다시 클릭했다. 제목은 모르지만, 귀에는 익숙한 곡이다.

학창 시절 쉬는 시간이면 수시로 팝송을 읊조리던 친구가 있었다. 학과 성적은 뛰어난 편이 아니었으나 팝송만큼은 늘 입에 달고 있던 그 애가 부러웠다. 그래서 그가 노래를 부를 때면 들리는 대로 한글로 가사를 받아 적어 따라 불렀다. 그때 그렇게 뜻도 모르고 반복해 들어서 익힌 노래 가사 중 일부가 ‘컨트리 로드, 테이크 미 홈 투 더 플레이스·····.’

사실 그때는 팝송을 들을 기회가 그다지 없었다. 전용 라디오도 없고 타국 제조사의 카세트 녹음기 플레이어였던 일명 ‘마이마이’ 같은 물건을 가져 볼 형편은 더더욱 아니었다. 꿈조차 가지지 못하던 냉혹한 현실 가운데서도 뜻도 모르는 노래는 가슴에 훅 닿았다. 알아듣지 못해도 온몸으로 느껴지는 힘의 근원은 음악이라서 가능했을 것이다.

지난 금요일에 서둘러 퇴근하고 근처의 사전투표장을 찾았다. 투표 마감 시간이 20분밖에 남지 않아 조급했다. 주차하고 내려 출입문을 바라보니 마당부터 3층으로 가는 계단까지 긴 줄이 늘어섰다. 젊은이가 많았다.

한때 젊은이의 정치 무관심을 염려했다. 정치에 관심 없다며 세상사 따위는 달관한 척 말하는 사람을 봐도 그랬다. 정치의 외면은 질 낮은 지배를 받게 되므로 매의 눈으로 지켜봐야 하는데 포기라니. 그런데 마감 시간을 앞둔 투표장에 가보니 기우였다.

휴일 정오에 햇빛과 익숙한 향기와 음악과 더불어 휴식의 시간을 가지고 나니 마음이 충만하다. 37%에 이른다는 대선 사전 투표율도 뿌듯하다. 이긴다, 진다가 아니라 관심과 참여가 합리적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신문, 라디오, T·V로만 정보를 접하는 시대가 아니다. 언제, 어디서나 가지고 있는 전화기를 열면 자료가 넘치고 1인 방송미디어도 넘친다. 아무리 거짓으로 포장하고 속이려고 해도 크로스체크만 잘하면 금세 들통난다. 그런데도 오늘 또 거짓 미디어에 속고 퍼뜨리는 사람을 본다. 너무 깊숙이 매몰된 그가 보는 세상은 어두운 벽뿐인가 보다.

해가 앞 동 건물에 가리고 거실은 어둑해졌다. 빛으로 들떴던 마음이 차분해진다. 나무 아래에서 연한 초록의 싹이 자라고 있다. 인간 세상의 불나방 같은 경쟁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순리의 세계이다. 말하지 않아도 들리는 봄의 언어 덕분에 휴식의 시간이 평온하다. 수없이 떠도는 세상의 말로 지친 영혼을 위안 받는 느낌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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