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명 시인
▲정진명 시인

한란 장군의 전설이 서린 용지는, ‘중흥에스클레스라는 거대한 아파트 단지 길 건너편에 있습니다. 저는 날마다 그 앞을 지나며 가슴이 아픕니다. 용지 옆에는 무농정이라는 정자가 있어서 대머리 한 씨를 기억하는 집이 있는데, 지금 용지 둘레에는 많은 집과 상가가 들어서서, 한때 잘 가꾸어졌을 용 연못은 방치된 채 비석만 즐비합니다. 제 생각에는 이곳이 대머리 한 씨의 본향이니, 종중회에서 이곳의 땅을 모조리 사들여서 무농정과 용지, 한 씨 고택을 잇는 범위를 성역화를 했으면 합니다. 행정명 방정동과 방서동이 바로 한 씨 고택의 우물과 연관이 있는 말입니다.

옛날에 다방에서 성냥으로 담뱃불을 붙이던 시절에, 사람을 기다리는 동안 하릴없이 하던 장난이 있습니다. 성냥골을 하나씩 꺼내어 쌓는 것이죠. 모양으로 계속 쌓아 올리면 한 자 높이로 쌓을 수 있습니다. 팍 하고 무너지면 다시 쌓으며 시간을 죽이는 것이죠. 옛날 우물에 가면 모두 이런 식으로 나무를 잘라서 댔습니다. 갓난아기들이 엉금엉금 기어가다가 우물에 빠지지 않도록 한 것입니다. 이렇게 나무로 테두리를 쌓은 우물이 방정(方井)이고, 그대로 그 동네가 방정동이 되었습니다. ‘방서동은 방정동의 서쪽이라는 뜻입니다. 용지, 방정동 방서동 용암동 분평동이 모두 대머리 한 씨와 관련이 있어서 생긴 이름들입니다. 이 어찌 대머리 한 씨의 영광이 아니겠습니까?

땅 이름에 용박골이 있으면 다른 언저리에는 반드시 범박골이 있습니다. 용바위와 범바위인데, ‘바위는 고구려말로 동네를 뜻한다고 말씀드렸죠. 용호상박이라는 말이 절로 떠오르는 대목입니다. 용은 냇물의 이미지이고, 범은 산의 이미지입니다. 그래서 풍수지리에서는 범이 웅크린 형상을 귀하게 여깁니다. 보은 회인면의 호점산성(虎岾山城)이 바로 범이 웅크린 모양이어서 그대로 호점이 된 것입니다. 그 산의 개울 옆에 용머리마을이 있다는 것은 정말 신기하죠. 개울 건너편에 용머리가 있어서 붙은 이름입니다.

분평동 너른 들을 가르는 가리()’에서 용의 이미지가 나오고 대머리 한 씨의 중시조 한란 장군에서 비롯한 장수이미지가 덧붙어 장수바위가 되고, 여기에 용박골이 가세하여 용암동과 분평동이 된 뒤, 무심천 상류 너른 들과 산은 용의 세상이 되었습니다. 이러니 제가 사는 동네에 용이 우글거린다고 할 밖에 다른 표현이 없습니다.

두만강을 건너 조금 더 북쪽으로 가면 흑룡강이 있습니다. 현지인들은 그 물줄기를 아무르라고 합니다. 우리말과 똑같은 뿌리입니다. ‘는 크다는 뜻이고, ‘무르는 말 그대로 물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을 중국인들은 이라고 옮긴 것입니다. 앞에 붙은 흑()은 방위를 나타낸 말에 불과합니다. 동서남북을 색깔로 바꿔 표현하면 각각 청백황흑이 됩니다. 그러니까 흑룡이란 자기네(중국) 북쪽을 흐르는 큰 강이라는 뜻입니다. 이들이 으로 옮긴 것은 앞서 설명한 용가리의 이미지와 같습니다.

중화사상을 걷어내고 원주민들의 말을 들어보면 그 이미지가 더 또렷합니다. 자신을 누구네의 북쪽이라고 표현하는 사람들은 없습니다. 그들은 그들 자신을 중심에 놓고 표현합니다. 그 표현이 아무르이고, 뜻은 용가리입니다. 분평동의 가리와 같습니다.

가 왜 크다는 뜻이냐고요? ‘엄지에서 받침이 생략된 겁니다. 아니면 암물이든지요. 두 미음 중 하나가 떨어진 것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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