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논단] 황종환 중국 칭화대학 한국캠퍼스 교수·한국자산관리방송 논설실장

아침 일찍 일어나 창밖을 바라보니 밤사이 하얀 목련꽃이 활짝 피어났다. 정말 봄이 가까이에 다가왔다는 느낌이다. 마음을 얼어붙게 만들었던 혹독한 추위가 물러가고 따사로운 햇살과 싱그러운 바람이 불어온다. 움츠러든 가슴을 활짝 펴고 한껏 기지개를 켜니 경직된 근육이 풀어지면서 몸과 마음이 한결 편안하다. 마음에 빚진 겨울을 보내고 맞이하는 봄은 호사를 누리기에 충분하다. 힘들게 보냈던 겨울이 조금 억울할 수도 있지만 열정의 봄을 맞이할 수 있어 설레는 마음이다. 우주 대자연의 순환처럼 인간의 삶도 선후 세대 간에 관계를 맺으며 상호 영향을 끼치면서 살아가는 것은 분명하다.

며칠 전 함박눈이 내려 하얗게 쌓인 눈꽃을 보고 싶은 마음에 갑자기 청계산에 올라갔다. 봄비가 내리는 능선을 따라 천천히 사색하듯 걸어가는데 길가에 서있는 진달래가 꽃봉오리를 살짝 내밀어 반겨준다. 벌써 봄은 저만치 와있는데 눈밭이 펼쳐진 산봉우리 풍경이 조금은 낯설다. 잠시 정상에서 머물다가 나뭇가지를 붙잡고 엉거주춤 미끄러지듯 내려오는 눈길이 여간 조심스럽지 않다. 중턱 쯤 내려오니 빗물에 듬뿍 적셔진 등산로가 질퍽질퍽하다. 눈길처럼 질퍽거리는 빗길도 불편하기는 마찬가지다. 이렇듯 변화하는 상황에 적응하지 못하면 힘들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삶의 과정에서 현실과 조화를 이루면서 살아가는 일이 중요하다.

코로나19 사태의 장기간 지속으로 많은 사람들은 사회전반에서 일어나는 문제로 인한 스트레스로 우울증상이 나타면서 심리적 고통을 겪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동시에 발생하는 문제라서 역설적으로 심리학자들 사이에서 마음의 맷집이라고 불리는 회복탄력성이 더욱 강조되고 있다. 관점의 전환은 긍정적인 감정을 갖게 하고 부정적인 영향이 미치는 범위를 최소화함으로써 회복탄력성을 증가시킨다. 직면하고 있는 상황에 대한 긍정적 평가는 생각과 감정 그리고 현실을 냉정하게 바라볼 수 있게 한다. 그렇다고 무조건 좋게 생각하자는 것은 아니다. 과도한 불안이나 왜곡된 인지프레임에서 벗어나 정확한 자기인식과 현실인식을 통하여 위기의 상황에서 용기와 긍정의 자세를 갖게 한다.

퀘렌시아(Querencia)는 스페인어로 스트레스와 피로를 풀며 안정을 취할 수 있는 피난처, 즉 안식처라는 뜻이다. 투우장 한 쪽에는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소가 안전하다고 느끼는 장소가 있다. 싸우다가 지친 소는 자신이 정한 곳으로 가서 쉬면서 기운을 되찾아서 계속 싸우기 위한 힘을 얻는다. 회복의 장소인 안식처에서 머무는 소는 더 이상 두렵지 않다. 이곳은 위기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고 느끼는 곳, 지치고 힘들 때 기운을 얻는 곳, 자기 본연의 모습에 가장 가까워지는 곳이다.

요즘 필자는 오랜만에 만나는 지인들로부터 예전보다 훨씬 젊어지고 편안해 보인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그때나 지금이나 별 차이가 없다고 스스로 생각하지만 남에게는 무엇인가 변화된 모습이 보였을 것이다. 세상의 왜곡된 인지프레임에서 벗어나 퀘렌시아를 찾아 힘을 얻어 냉정하게 변화를 받아들이려고 노력하지 않았을까 싶다.

지난밤 비바람이 불더니 산수유가 활짝 피어나고 따스한 봄의 향기가 다가온다. 잠깐 산책하러 들렀던 봉은사 주변에는 그야말로 봄의 향연이 펼쳐졌다. 홍매, 백매, 산수유, 목련, 진달래, 개나리 그리고 산책로를 둘러싼 오죽까지 싱그럽고 화려한 봄의 자태를 보여준다. 겨우내 뻣뻣해 보이던 나무들이 통통하게 속을 채우고 있다. 머지않아 나뭇가지에 새순이 돋아나고 나뭇잎으로 치장할 것이다.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 잎이 없고 지지 않는 꽃이 없듯 영원한 것은 없다. 이 순간이 영원히 지속되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향기는 강하나 자만하지 않으며 소리 없이 벌과 나비를 부르는 꽃들을 고이 가슴에 담는다. 고통스러웠던 시간이 지나가면 언젠가 마음속 깊이 간직한 기억을 알음알음 꺼내어 회상하면서 추억하고 싶다.

떠나가기가 너무 아쉬운지 마지막 추위가 봄비와 함께 찾아와 기승을 부린다. 꽃샘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매화와 산수유가 화려하게 피어났다. 매일생한 불매향(梅一生寒 不賣香)은 매화는 한 평생 추워도 향기를 팔지 않는다는 말이다. 아무리 추울지라도 참된 선비처럼 결코 향을 팔지 않는다. 지조 있는 인생을 살아가는 일이 그만큼 어렵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자연의 섭리 앞에 추하지 않는 것이 바로 정의다. 추운 겨울을 참고 견뎌낼수록 봄의 햇살이 고맙고 소중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좌절을 겪어본 사람만이 남의 좌절이나 아픔을 공감할 수 있다. 성공과 좌절을 경험하면서 인격이 깊어지고 성숙해진다는 사실은 당연하다.

새는 좌우의 날개를 치며 날아간다. 한쪽 날개만으로는 날 수 없다. 전체가 하나의 고리를 이루고 서로 영향을 끼치며 살아간다. 그래서 때로는 소중한 가치를 지켜야 하는 것도 때로는 과감하게 혁신하는 것도 필요하다.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오듯이 고난을 견디면 행복이 찾아오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각자 느껴지는 계절의 순서가 다를 뿐 일 년 사계절 이십사절기는 어김없이 다가온다. 눈이 온다고 다시 겨울이 오는 것은 아니다. 지나간 시절을 다시 되돌릴 수는 없다. 대나무 숲을 스치듯 소리 없이 불어오는 바람이 유난히 따뜻하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텅 비어있는 영혼의 안식처인 고향집 마당에도 봄꽃들이 차례차례 피어날 것이다. 북풍한설을 겪어내고 꽃을 피우는 매화와 동백처럼 지고지순한 삶을 꿈꾸는 봄날의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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