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목련] 육정숙 수필가 

바람은 아직 찬 기운이 머물러, 옷깃을 여미게 하지만 햇살은 한결 보드라워졌다. 단단한 가지 끝에선 초록으로, 산수유는 수줍은 미소로 노랗게, 벚꽃은 밝고 화사하게, 쑥과 냉이도 해맑은 얼굴로 봄 길을 찾아왔다.

굳게 다물고 있던 대지에 봄물이 들면 단단한 흙을 비집고 수런수런 새순이 움터오니 사람들은 다시 기뻐하고 새들은 다시 희망을 노래한다.

날씨가 원만히 풀리기 시작 할 무렵, 손바닥 만한 텃밭에 널브러진 지난 계절의 흔적들을 정리하고, 두둑을 만들어 비닐멀칭을 해 놓았었다. 어느새 텃밭에 오얏나무도 수줍은 듯 꽃 이파리를 반쯤 제치며 하얗게 기지개를 켠다. 언제나 이 무렵이면 상추며 쑥갓 등등의 포토 묘를 심고 비닐 터널을 만들어 준다. 늘 부지런을 떤다고 성화를 대도 소용없단다. 지인은 부지런한 남편 덕에 올해도 농약을 사용하지 않은 싱싱한 쌈 채소를 남보다 일찍 먹을 수 있을 것 같다고 은근슬쩍 내어놓는 자랑이 귀엽다.

지인 덕분에 오얏나무 아래서 흙속에 상추 한포기 심어 보게 되었다. 다독다독 정성스레 흙을 덮어주고 물을 주었다. 아직은 비닐터널의 보호를 받아야 하지만 어느 순간 쑥쑥 자라 건강한 식탁위에 오를 것이다.

비록 우리의 식재료가 될 채소이지만 흙에 뿌리를 두고 봄바람에 나폴 거리는 어린 채소들의 모습이 너무나 소중하고 사랑스러웠다. 어떤 이상기후가 닥쳐와도, 어떤 병해충에도 잘 견디고 잘 자라주길 바라며 영양제와 물을 흠씬 뿌려주었다. 먹거리가 될 상추 한포기도 튼튼하게 잘 자라주길 애정 어린 눈길로 다독이는데……. 살아있다는 것, 생명은 고귀한 것이다.

핸드폰 검색을 하다 보니 아기의 등에 알파벳과 숫자들이 쓰여 있는 사진 한 장이 눈으로 들어왔다. 아직 기저귀를 떼지 못한 아기의 등이었다. 아기의 등에는 아기의 이름과 출생일 등등 가족정보가 적혀있었다. 기사를 다 읽어 내려가지 못하고, 감정이 복받쳐 올랐다. 눈앞이 아득해지고 귓속이 멍멍해졌다. 순간 심장이 멈춰버린 것 같았다.

기사내용은 ‘이름과 전화번호, 출생일 등을 아기의 등에 쓴 이유는 러시아의 침공으로 생명을 담보 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부모가 죽더라도 누군가 아기는 거두어 주길 바라는 마음에서 써 내려 간 것이다. 종이에 쓰면 잃어버리거나 사라질 염려가 있으니 아기의 몸속에 적은 것이다.…… .’

부모가 아기의 등에 글자 한자, 한자를 써내려가는 동안, 아기는 웃고 장난치고 행복했을 텐데, 반면 아기의 등에 가족정보를 써내려가는 부모의 심정은 어찌 했을지. 그 심정을 말로 다 할 수 있을까! 울컥 목이 멘다. 울분이 치솟는다.

문득 손자가 보고 싶어졌다. 핸드폰에 저장 해두었던 15개월 남짓 된 손자 사진을 꺼내본다. 할미를 보고 환하게 웃는다. 마냥 사랑스럽다. 아기를 보고 있자니 세상 무엇이 부러울까싶다. 아기들은 세상으로 행복을 나눠주러 온 천사다. 메는 목을 추스르며 튼튼하게 잘 자라주기를 기도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무엇을 위한 전쟁인가! 부디 우크라이나의 아기들에게, 우크라이나에 신의 가호가 있기를.

비 예보는 없었는데 하늘도 잿빛으로 우리 가까이 내려앉았다. 오얏나무 하얀 꽃봉오리도 순하고 여린 꽃 이파리를 반쯤 열어놓은 채, 오도카니 서있다. 무심천에 벚꽃이 절정이라는 카톡 문자가 들어왔다. 세상일이야 어떻든 봄은 기어이 오고야 만다. 아무리 춥고 혹독한 겨울도 봄바람을 이기지 못한다. 세상이 못 견디게 힘들어도 봄 날 사랑스런 꽃 잔치에 위로 받으며 앉은자리 툭툭 털고 다시 일어나고 다시 노래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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