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목련] 정혜련 사회복지사

조선왕조실록은 조선왕조의 사서(史書)로서 풍부한 내용과 상세한 묘사로 그 어떤 역사기록보다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이러한 조선왕조실록에서 충청도가 언급된 세종실록의 내용이 매우 흥미롭다.

세종 즉위년 8월 14일 기록에 따르면, 궁중의 말을 관리하던 관청에서 충청도 면천(沔川) 장덕곶(藏德串)의 목장(牧場)은 가뭄으로 말미암아 수초(水草)가 다 말랐으니, 목장을 당진(唐津) 맹곶(孟串)으로 옮기기를 요청하자 이를 임금이 그대로 좇았다고 하며, 세종 즉위년 9월 20일 예조에서 충청도는 농사의 실패가 더욱 심하니, 근로하는 백성들에게 폐가 되는 물건은 일체 모두 금해야 한다고 하자 임금께서 그대로 따랐다고 한다.

세종 1년 3월 9일 충청도 관찰사 이맹균(李孟畇)이 난민 규정에 대해 건의하니 이를 의정부와 6조에 명하여 의논하게 한 후 의견을 그대로 따랐다고 적혀 있다. 세종 1년 1월 5일에는 충청도에 사람을 보내 수령들의 구휼하는 일에 관한 성실성과 굶어 죽은 사람의 유무를 살펴보게 하고, 세종 1년 1월 9일에는 충청도 관찰사가 각급 관청의 노비 중 농사를 못 지은 사람은 세금을 면제해 달라고 하자 그대로 따랐다고 한다.

실록의 위 기록을 통해 세종대왕은 백성의 어려움을 살피고, 이를 보고한 지방관의 건의를 따라주거나, 사안이 복잡하면 중앙에서 다시 논의한 후 그대로 수용함으로써, 민주적으로 행정을 집행하고 가장 합리적인 결과를 도출하여 애민(愛民)을 실천한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의견이 다를 때는 절충안도 제시하는데, 세종 1년 8월 2일 충청도 감사 정진(鄭津)이 “각 고을의 소금 만드는 사람들이 대마도 정벌에 나가서 소금을 굽지 못하니, 소금 공납을 반감하여 주십시오." 하자 세종대왕은 처음에는 금년은 전액을 감하라고 했다가 참찬 변계량이 전액을 감하면, 국가의 수요에 모자라니 반액을 거두어야 한다고 하고, 이어서 대사헌 신상(申商)이 충청도 아랫녘에서 구운 소금은 나라에서 쓰는 것이 아니고, 포목과 물화(物貨)로 바꾸어 직물을 다루는 관청으로 올려 왔고, 충청도 웃녘에서 구운 소금만이 국가에서 사용되었으며, 소금의 공납은 인수(人數)에 따라서 거두었다고 자세하게 보고하자, 이를 듣고 정벌에 출정했던 사람들만 면제시키는 것이 옳다고 조정했다.

현재로 치면 지역 문제에 대해 담당자와 각 부처 공무원의 말을 경청하고 세금을 면제시켜야 할 대상과 범위 그리고 국가의 세금부담을 모두 고려하여 효율적인 정책지시를 한 것이다. 그리고 관리들도 사람인지라 겉으로는 일 때문에 다투는 듯 보여도 속사정은 인간관계에서 오는 감정싸움이 원인일 수 있는데, 충청도 보은현에서 쌀을 바치는 행정절차 문제로 사사롭게 원수가 된 김점과 서선이 후에 각각 직책을 받아 조정에서 만났는데 서로 간사하다느니, 죄인이라느니 하며 임금 앞에서 소리치고 막말로 다투자, 실록에 따르면 임금께서 “양편을 타일렀다”라고 한다.

다툼의 핵심적 원인이 마음이 서로 상한 것임을 파악하고 시시비비(是是非非)를 따지지 않으며, 정쟁(政爭)이 되지 않도록 양쪽을 다독이는 모습이 지금의 민주주의 국가에 사는 우리도 감히 따라올 수 없을 정도로 수준이 높다. 국민을 위한 민주적이고 합리적인 정치가 이루어지길 소망하며 세종실록을 통해 충청도 지역을 살핀 육백 년 전의 이 땅의 리더를 기억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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