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목련] 이향숙 수필가

바람이 좋다. 꽃잎에 햇살이 내려앉아 눈이 부시다. 하늘은 청명하고 차들은 일렬 행진 중이다. 풋풋한 연인들이 사진을 찍느라 가다 서기를 반복한다. 나도 그들의 보폭에 맞추어 천천히 걷다가 시간을 확인하고 발걸음을 재촉한다.

일이 많고 새로 시작한 것이 있어 꽃구경은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했다. 그래도 출근길 한쪽으로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풍경 속에 나를 그려 넣었다. 때를 맞추기라도 한 듯 조카가 점심시간을 이용해 꽃놀이 가자는데 못 이기는 척 따라나섰다. 시샘하는 비라도 내리면 꽃잎은 떨어질 터 마음이 앞섰다. 아들이 사진을 찍어주고 운전은 조카가 해 즐기기만 하는 꽃놀이다.

시간을 붙잡아 매어 놓은 것 같은데 점심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차에 올랐다. 차 안에서 보는 꽃길은 걸으면서 보는 것과 또 다른 매력이 있어 나름의 감흥에 젖었다. 하지만 얼마지 않아 앞서가던 차들이 주차장처럼 멈추었다. 혼잡해져 앞으로 나갈 수 없을 즈음 경찰까지 동원되어 되돌아가란다. 적잖은 거리를 후진하다가 간신히 유턴했다. 초행길이라 불안한데 샛길을 발견한 운전자는 용감했다. 좁은 농로가 이어지고 농가들이 시야를 가렸다. 그저 일터 방향으로만 향해서 가기로 했다. 방지턱이 높아 롤러코스터를 타는 기분이 들었다. 밤길이 아니라 다행이라 싶은데 저 멀리 낯익은 거리가 보인다.

살다 보면 오늘처럼 뻔히 어디쯤인지 느껴지지만 좀처럼 길이 보이지 않을 때가 있다. 우여곡절 끝에 겨우 찾았으나 큰 산이 가로막을 수도 있고 길이라 여겨서 들어섰는데 누군가 위장해 놓은 함정에 빠질 수도 있다. 그럼에도 걸어야 한다. 혼자라면 어려울 일이다. 다행일까. 차 안에는 운전하는 조카와 아들이 있고 뒷자리에 앉아서 그들이 하는 말에 추임새를 넣어주는 게 일인 이 사람이 있다. 처음에는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낯선 시골길을 벗어날 수 있다 믿으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고 풍경도 곱게 눈에 들어온다.

심경이 복잡한 일이 있었다. 좀처럼 일이 풀리지 않았다. 말리지 못한 책임도 느껴지고 면목이 서지 않았다. 조언해도 받아들여지지 않고 언성이 높아지기 일쑤였다. 위태로운 길을 가고 있는 게 뻔히 보이는데 아무리 말해도 쇠귀에 경 읽기였다. 철저히 자기만의 벽을 쌓고 있었다. 더 이상 할 수 있는 것이 없구나 싶었을 때, 그만 폭탄이 터지고 말았다.

이제 어쩌나 싶었다.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들이 이구동성으로 소리쳤다. 그곳은 길이 아니라고, 이쪽으로 건너오라고 말했다. 어떤 이는 자신의 손을 잡으라 하고 다른 이는 당신의 삶에 빗대어 지혜롭게 길이 난 방향으로 불빛을 비추었다. 고뇌에 빠진 그가 한참을 머뭇대었다. 한발만 내디디면 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명쾌한 답 없이 며칠이 지나고 있었다. 바라보는 이들의 입술이 타들어 가고 있다. 그를 잠시 멈추게 하는 일조차도 혼자서는 어려운 일이었다. 정신을 가다듬은 내 온몸은 파편이 박혀있다.

마음을 쉬게 하려 찾은 벚꽃길이다. 그가 찾으려는 파라다이스도 계절마다 색을 바꾸는 이런 길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더디 가는 것도 그다지 나쁘지 않다는 것을, 소박하고 작은 것에서부터 행복을 느끼고 마음의 여유를 갖기를 바란다.

가끔은 꽃놀이 하듯이 천천히 걸을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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