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목련] 육정숙 수필가

벚꽃이 만개한 순간을 놓칠세라 많은 사람들이 꽃구경을 나왔다. 들녘으로 꽃망울 터지는 소리에 꽃 마중 나온 이들의 봄이 화사하다. 그 틈새에서 사이사이 나물 캐는 아낙네의 손끝으로 묻어나는 봄 풍경이 정겹다. 밥상위에 놓여 질 쑥국에 달래무침이며 냉이무침이 상상 속에 이미 입맛을 돋운다.

해마다 오는 봄이지만 꽃구경도 인연이 닿아야 할 수 있는 일인 듯싶다. 살다보니 산다는 일의 관계 속에서 이런저런 핑계에 변명도 많아진다. 이로 인하여 시기를 놓치거나, 겨우 시간을 내보지만 비가 내려 만개한 꽃을 제대로 볼 수 없을 때도 있다. 일 년을 더 기다려 상면 한다 할지라도 그 또한 기약이 없다.

살아가면서 내 하고자 하는 일들이 자신의 뜻대로, 계획대로 이루어지는 일들이 얼마나 될까. 어찌 보면 남들이 대수롭게 하는 봄날의 한철 꽃구경도 쉽지만은 않은 것 같다.

봄날 꽃 부름에 화사한 하루, 봄은 내게도 곱디고운 꽃물을 들이는 중이다.

꽃놀이에 푹 빠진 사람들 틈을 빠져 나와 한적한 산길로 접어들었다. 연록의 봄풀들이 풋풋하다. 촉촉하니 싱싱하다. 초록물이 굽이 진 오솔길이며 밭둑, 논둑, 그 옆으로 작은 실개천이 한 폭의 그림이다. 어디선가 본 듯한, 마치 고향마을이듯 익숙하다. 정겹고 평화롭다.

봄 풍경은 마치 동화 속 같아서 아련한 그리움으로 짙어온다. 산야에 한 그루 꽃나무 되어 연분홍 꽃망울로 부푼다. 꿈결인 듯 봄을 품었다. 터질 듯 부풀어 오른 꽃망울을 여린 햇순이 말끄러미 바라보며 배시시 웃는다. ‘언제나 이 자리에서 계속 머물 수는 없는 것이야’ 봄날은 가슴으로 새순이 돋는다. 그들은 어느새 원숙한 자신의 미래를 향한 꿈에 젖어 들고 있었다.

벚꽃이 쏟아내는 정열이 있다면 산 복사꽃은 수줍음을 지녔다. 벚꽃은 한 송이로 피어 있는 것 보다 수많은 꽃들이 한 번에 피어나야 멋이 있고, 산 복사꽃은 고목에 가늘게 뻗은 여린 곁가지에서 한 두 송이 피어 있어야 고풍스럽다.

추운겨울을 이겨내고 찾아오는 봄날이 드세지 않다. 보드랍다. 은은하다. 포근하고 따스하다. 시간이 흐를수록 제 모습 그대로 그윽하게 짙어가는 모습이 의연하다. 단단한 벽을 뚫고 나오는 것은 강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여리고 보드라운 새싹이다. 여린 꽃잎이다.

봄은 어머니를 닮았다. 산 복사꽃이 지고나면 꽃 진자리에 단단한 열매가 맺힌다. 복사꽃뿐이랴.

그들은 시간을 따라 씨앗을 품는다. 그 씨앗이 자라 꽃을 피워내고 꽃 진자리에 열매를 품고, 또 다시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어린 시절, 어머닌 산 복숭아술을 담가놓고 술 익기를 기다렸다. 잘 익은 술은 향과 맛과 깔이 일품이다. 명절이면 처갓집을 찾아오는 맏사위를 위해 외할머니는 해마다 산 복숭아주를 담으셨다고 한다. 좋은 술과 안주는 내 딸에게 잘하라고, 장모가 사위에게 내리는 모종의 말없는 당부가 아닐까.

물질이 풍부해지고 생활이 편리해 질수록 세상사는 점점 더 복잡해져 간다. 경쟁에 뒤쳐질 수 없다고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의 속도를 쫓느라 앞뒤 돌아 볼 여유 없이 홀로가기 바쁘다. 무엇을 위한 일인지, 무엇을 잃고 가는지, 이미 잊은 지 오래다. 시간이 흘러 삶이 더 익어가고 깔의 깊이가 더 해 갈 때쯤이면 알 수 있으려나. 그 무엇이 무엇인지.

어느 봄날에 두어 송이 피어있는 산 복사꽃에서 무심히 흘러 간 시간을 펼쳐본다. 아마도 산 복숭아 술 익어 가던 날들을 오래도록 품고 있을 것 같다.

저작권자 © 충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