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시평] 김윤희 수필가·전 진천군의원

4월은 깨어나는 달이다. 꽃들이, 초록이 눈을 뜨고 의식이 깨어난다. 산야가 싱그럽다 한적한 길을 따라 ‘운보의 집’ 솟을대문으로 들어섰다. 사랑채를 지나 중문을 넘어서니 안채가 고즈넉하다. 오래된 정자와 함께 연못에 물고기가 한가롭다. 안마당 한쪽으로는 500여 년 모과나무가 여기저기 삭은 몸통을 하고도 연초록 잎을 피워 올렸다. 적지 않은 세월의 풍상이 읽힌다. 쉽지 않았던 주인장의 삶의 애환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연륜이 녹아 있는 자연 그대로의 수석들이 잘 가꿔진 정원과 어울려 대가댁 풍모를 드러낸다.

댓돌 위에 신발을 벗어 놓고 방으로 들어섰다. 갖가지 굵고 가는 붓과 먹들이 즐비하게 놓여 있다. 평생 그림을 그리며 산 주인 내외의 향취가 느껴진다. 또 다른 방으로 걸음을 옮기니 고풍스러운 가구들과 화백의 걸음을 도왔던 지팡이가 의자에 비스듬히 걸쳐 있다.

나무 계단으로 연결된 지하 방 입구에 이르렀다. “예수의 생애 특별관”이다. 갓을 쓴 예수와 주변 인물이 모두 한국인이다. 예수의 일대기인 성화를 한국 풍속화풍으로 담아냈다. 수태고지부터 예수의 승천까지 모두 30여 편에 달한다. ‘아기 예수의 탄생’ 그림 앞에 섰다. 마구간이다. 갓 쓴 아기 예수가 한복을 입은 여인들에게 둘러싸여 있고, 닭과 소와 말이 한가롭다. 어린 시절 보았던 우리네 외양간의 모습이다. 옆으로 한 발을 옮겼다. 색동저고리를 입은 아기 예수에게 오사모에 관복을 갖춘 동방박사가 경배하는 모습이 색다르게 다가온다. 다음 그림은 아기 예수가 이집트로 피란을 떠나는 장면이다.

운보가 성화를 그리던 시기는 1952년~1953년, 한창 6.25전쟁 중이었다. 군산 처가로 피란하여 고통스러운 시간을, 예수 일대기를 그리며 보냈음을 알 수 있다. 예수의 일생이 당시 동족상잔의 민족적인 비극과 퍽 닮았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충격이다.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다. 예수에게 갓을 씌우고, 우리의 두루마기를 입혀 그의 일생을 담아낼 생각을 하다니. 기발한 아니, 발칙한 발상이 아닌가. 분명 보통 사람의 사고는 아니다. 머저리거나 천재들이 품을만한 별난 생각이다. 그는 생각한 것을 과감하게 실행했다. 누구도 손대지 않은 세계다.

댓돌에 벗어 놓은 신을 신고 나와 뒤뜰로 돌아드니 하얀 목련이 눈물처럼 하늘하늘 지고 있다. 분분히 내려앉은 꽃잎을 긴 나무 의자가 말없이 받아 안는다. 운보도 가고 우향도 떠나간 빈자리에 이렇듯 목련 꽃잎이 대신 앉았다 가는가 보다.

이어진 ‘운보미술관’으로 발길을 옮겼다. 화백 부부의 연보가 자세히 소개되어 있다. 운보에게는 운명적인 두 여인이 있다.

1914년 종로에서 태어난 운보는 일곱 살, 보통학교에 입학하던 해 장티푸스 열병으로 청력을 잃는다. 그를 화가의 길로 이끈 것은 어머니의 혜안이었다. 운보의 손을 잡고 이당 김은호 화백을 찾아간 것이다. 오늘의 운보를 만든 첫 번째 여인이다.

또 한 여인은 우향 박래현이다. 그녀는 동경여자미술전문학교 출신으로 당시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최고상을 수상한 재원이었다. 1946년 국립민족박물관에서 혼례를 올리고 평생 함께하며 운보의 미술 세계에 큰 영향을 준 여인이다.

운보의 집은 첫 번째 여인의 고향이다. 두 번째 여인 우향을 떠나보내고 내려와 생을 마감한 곳이다. 미술관을 지나 조각공원 오른쪽으로 오르면 ‘운보와 우향의 묘’가 있다.

그에겐 한국화단의 거목이란 명성과 ‘친일반민족행위자란 불명예가 함께 따라다닌다. 수난의 역사와 맞물린 시대적 비운을 안고 있는 작가의 시린 삶이 목련 꽃잎으로 내려앉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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