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목련] 육정숙 수필가

비 내리는 창밖의 풍경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혼란스럽던 감정이 차분해진다. 그러나 그 차분함 속에는 시나브로 슬픈 감정이 스미기 시작하고 그것은 허공으로 끝없는 공상들을 조작해낸다.

빗물을 따라 가던 시선이 멈추었다. 화려하지도 예쁘지도 않은 대파 한 뭉치 심겨 진, 작은 화단에도 빗물이 스며들었다. 그 옆에서 초라하게 영역을 지키고 있는 빈 의자 하나. 비에 젖어드는 모습이 이제는 그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을 듯, 태연하고 느긋해 보인다.

의자를 보면 쉼을 생각하게 된다. 잠시잠깐이라도 의자에 등을 기대고 앉는다는 것은 몸과 마음의 평안을 누릴 수 있는 시간이 된다. 바쁜 일상 속에서 잠시나마 의자에 기대 앉아 눈을 감고 있으면 노곤했던 육신이 나긋나긋 해진다.

의자는 고대 이집트 때부터 사용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집트는 의자의 다리가 동물의 다리 모양과 비슷하고, 로마시대는 가위자형 의자를, 영국 튜더 왕조 때는 무거운 상자 같은 틀로 된 의자였으며 16세기 의자들은 속을 넣거나 겉을 씌우는 장식을 했고, 17세기부터 화려하게 세공한 의자가 만들어졌으며 영국의 앤 여왕시대 때 완만하게 굽은 등받이 의자를 사용하기 시작했고 1929년 바르셀로나에서 만들어진 의자가 현대 의자의 모범이 되었다고 한다.

우리는 일상에서 사무용, 안락용 외, 등등 그 쓰임에 따라 형태가 다른 의자들을 종종 접하게 된다. 작은 화단 옆에서 비를 맞고 있는 저 낡은 의자도 한때는 어느 곳에서 누군가의 생업을 위해, 또는 힘든 업무 중, 간간히 쉼을 위해 제 등을 아낌없이 내 주었을 것이다.

아무리 곱고 아름다운 꽃도 질 때가 되면 깔이 바래지듯, 인간이나 물상도 그를 거역 할 수는 없는 것 같다. 세월이 더해 감에 따라 수분도 살도 빠져 퀭한 눈으로 동굴처럼 캄캄하게 나를 바라보는 어머니.

매일 이른 새벽 어머니의 동동 거리는 발자국 소리는 힘차게 아침을 퍼 올렸다. 학교 갈 준비 하라고 잠을 깨우던 카랑카랑한 목소리, 소풍 가던 날, 꽃 같이 예쁘게 김밥을 싸던 곱고 통통하던 어머니의 손이 아직도 생생하고 눈에 선한데….

어느 날, 어머닌 뜨락에 놓여있는 낡은 의자에 앉아 햇살을 품고 계셨다. 의자는 어머니를 위해 제 몫을 톡톡히 해내고, 어머닌 그를 오늘처럼 비에 젖게 두지 않았다. 의자에 앉아 가끔은 파를 다듬고 마늘을 까면서 꽃은 고와서, 햇살은 따스해서, 오월의 바람은 꽃향기가 나서 좋다던 어머니. 어머니의 손길이 지나간 뜨락으로 여전히 봉숭아꽃이 수줍고 땅으로 낮게 깔려도 꽃을 피워내는 채송화는 변함없이 생글거리는데, 어머닌 다 낡아버린 빈 의자만 덩그러니 남겨두고 어딜 가셨는지.

그 위로 빗물인지 눈물인지 창과 창 사이로 뒤범벅이 되어 시야가 흔들린다. 물상들의 형체가 흐트러져 빗물을 따라 간다. 세상의 것들이 모두 일그러지고 흰색, 검은 색 얽히고설킨 채 빗물을 따라 그저 흘러간다. 낡은 의자는 세월 속에서 동행을 잃고 왼 종일 비를 맞고 있다. 의자가 묵직하다. 내 힘으로 들어올리기엔 역부족이다. 어머니를 기다리기라도 하듯, 그 자리에서 움직이려 하질 않는다. 겨우겨우 쓰레기장으로 옮겨놓고 노란딱지 하나 붙여 놓았다.

봄이 되니 작년에 피었다 진 꽃들도 화들짝 다시 찾아오고, 여린 가지도 혹독하게 추웠던 겨울을 견뎌내고 초록하게 다시 싹을 틔워내는데, 점점 희미해져가는 어머니의 시간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산과들에 꽃이 만발하고 그 향기가 시끌벅적한 오월인데. 요양병원 콘크리트 건물 속, 유리 칸막이를 사이에 두고 서로를 응시하는 힘없는 눈동자만 강물이 되어 철철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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