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칼럼] 한옥자 수필가

지방의 소도읍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면서 여간해선 ‘창경원 벚꽃놀이’를 가볼 기회가 없었다. 어머니가 곱게 수놓은 분홍 한복을 입고 핸드백과 양산까지 챙겨 들고 아버지와 함께 벚꽃놀이를 가던 날도 마음만 앞설 뿐 감히 따라가겠다는 말은 하지 못했다. 더구나 늦은 밤까지 꽃놀이를 즐기고 올 예정이라던 부모님은 자식의 애타는 마음 따위는 안중에도 없어 보였다.

‘내가 창경원의 원숭이냐?’는 말을 걸핏하면 듣고 자랐다. 이 말은 자신을 뻔히 쳐다보는 구경꾼을 향해 못마땅한 감정을 섞어 항의로 했던 말인데 원숭이의 모습을 책에서나 봤지 직접 본 적이 없으니 원숭이의 행동이 어땠길래 그런 말을 하는지 막연했다. 다만 원숭이가 창경원을 통틀어 대변하는 동물임은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여학교를 졸업한 후 처음으로 친구들과 창경원에 가게 되었다. 벚꽃뿐 아니라 원숭이를 보게 될 거라는 기대가 컸다. 그러나 만개한 벚꽃은 나를 반겼지만, 원숭이는 어디서도 볼 수가 없었다. 창경궁 복원계획에 따라 이미 1983년 경기도 과천시의 서울대공원으로 동물이 옮겨간 사실을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창경원을 간 것이 아니라 창경궁을 간 것이다.

창경궁은 일제에 의해 1909년 11월 1일, 일반에게 공개되었다. 이곳은 3명의 대비를 모시던 조선 9대 임금인 성종 때 지어진 궁궐이며 창덕궁과 함께 ‘동궐’로 불리는 왕실의 어른인 대비를 위해 지은 궁이었다.

일제는 공원을 조성한다는 핑계로 창경궁의 수많은 전각을 없앴고 나무를 베어버리고 창경원을 만들었다. 춘당지라는 연못 위에는 케이블카를 설치하여 하늘을 운행하였고 이를 신기하게 여긴 사람들은 마치 구경거리에 목을 매기라도 하듯이 서로 타려고 줄을 섰다고 한다.

창경원은 훗날 민족의 얼을 짓밟으려는 일본의 계책 중 하나였던 것으로 평가된다. 궁의 격을 낮추어 민족의 자존심을 말살하기 위한 책략이었고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서울에서 가장 큰 유원지로 사람들에게 주목받고 말았으니 나라를 빼앗기고도 왜 뺏긴 줄도 모르던 우매함의 연속이 아닌가.

당시에는 창경원 한 번 안 가보면 축에 끼지 못하는 것으로 알았단다. 민족의 정신을 말살하기 위해 저질렀던 일제의 대표적 악행이라는 사실도 훗날에나 알게 되었으니 아무리 감추려 해도 결국 드러나는 것이 역사적 진실이다.

특정층만 사용하던 공간을 개방한 예가 또 있다. 1980년 대청댐 준공식에 참석했던 전두환 전 대통령이 대청호의 풍광에 매료돼 대통령 전용 별장인 ‘청남대’의 건설을 지시했다. 그러나 노무현 전 대통령은 충북 청주시 상당구 문의면에 있는 대통령만의 비밀의 공간이었던 청남대를 권위주의의 상징이라고 여기고 국민에게 개방하라고 지시했다. 그 후 관리권이 충청북도로 이관되면서 1983년 12월 준공된 대통령 전용 별장인 ‘청남대’는 약 20년 만에 일반인들도 이용할 수 있는 시설로 거듭나 지금까지 아무 탈 없이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고 있다.

국민에게 청와대를 돌려주겠다는 뜬금없는 소식을 보면서 창경궁의 창경원화와 청남대의 개방이 더욱 대비되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청와대가 대통령이 나가고 국민이 들어온 것이 아니라 지난 70년의 세월을 놀이공간으로 바꾸면서 역사를 조롱하고 모욕한다는 느낌이 짙어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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