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시평] 김윤희 수필가·전 진천군의원

6월의 태양이 뜨겁다. 한여름을 방불케 한다. 날씨도 속이 있어 진저리치듯 울화를 토해내고 있는 건지 모른다. 1950년 6월 25일, 그날을 생각해 본다. 어쩌자고 또 나라가 온통 화염에 휩싸인단 말인가. 일제에게 주권을 빼앗긴 채 35년의 세월, 목숨을 연맹해 온 지 5년 만의 일이다.

같은 민족끼리 총부리를 겨눈 채 3년을 치열하게 싸웠다. 그래도 승부는 나지 않았다. 잠시 휴전이다. 우리나라 한반도는 중간에 3·8선을 경계로 남과 북으로 나뉘었다. 총성 없는 전쟁은 현재 휴전이란 이름으로 휴지기에 들었을 뿐 끝나지 않았다.

휴전, 너무 오래간다. 70년 세월이 흐르는 동안 전쟁이 있었던 사실도 기억에서 멀어져간다. 젊은이들은 끝나지 않은 전쟁을 인지조차 하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태양이 저리 달아오르는 것도, 속이 바싹바싹 타들어 저수지가 바닥을 드러내는 것도 다 이유 있는 것이리라. 무언의 경고다.

우리나라가 어떤 나라인가. 1910년 일제에 나라를 송두리째 빼앗기고 얼마나 많은 이들이 목숨을, 전재산을 내놓으며 나라를 찾으려 했던가. 자주독립을 위한 일에 남녀가 따로 없었다.

그 중심에 우뚝 선 사람이 있다. 임시정부 국무원 참사로 활동한 충북의 여성독립운동가 이화숙이다. 그녀는 서울에서 태어나 이화학당 제1회 졸업생이 되었고, 곧바로 독립운동에 뛰어든다. 항일애국단체인 '대한애국부인회' 상하이 총회 회장으로, 대한적십자회 간호사로 종횡무진 나라를 위해 투신했다.

그녀의 삶을 들여다보면 빠뜨릴 수 없는 또 사람이 있다. 파리강화회의에 참여하기 위해 뉴욕에 머무는 중에 만난 정양필이다. 그는 박용만이 세운 미국내 최초의 한인군사학교인 '한인소년병학교'를 다니면서 항일투쟁 군사 훈련 수업을 받고 졸업한다. 이어 네브라스카 주립대학에서 농학특업사 학위를 얻고 1919년부터 독립운동에 뛰어든다. 그해 4월, 서울에서 비밀회의를 갖고 한성임시정부에서 각원을 발표할 때 평정관(評政官)에 피선되어 활동을 한다.

이후 부부가 미주에서 활동하며, 사업도 성공시킨다. 1942년부터 북미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 디트로이트 지방총회 회원으로 독립자금 지원 등 독립운동을 했고, 1974년 디트로이트에서 사망한다.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정양필의 부친 정순만 또한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에서 선 굵은 인물이다. 1876년 옥산 덕촌에서 태어난 검은(儉隱) 정순만은 1896년 독립협회 창립에 참여하면서 독립운동의 폭을 넓힌다. 1902년 도미하여 재미 동포에게 독립사상을 고취시켰고, 을사늑약 이후 귀향하여 '덕신학교'를 세워 민족교육에 힘썼다. 이로 인해 덕촌리가 1919 항일 만세운동에 중심에 설 수 있었던 게 아닌가 싶다. 교육의 힘이다. 의식이 깨어 있음이다.

그는 1906년 곧바로 만주로 망명하여 이상설과 함께 용정에 '서전서숙'을 세워 항일 민족교육에 주력하는 한편, '신민회'를 조직하고 연해주에서 "해조신문" "대동공보"를 발간한다. 또한 13도의군, 성명회, 권업회에 적극 참여하며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다 같이 목숨 내놓고 독립운동을 하는 과정에서 총기 사건이 발생한다. 정순만과 양성춘, 두 당사자에게 비극적인 사건이었다. 그는 그렇게 시나브로 뇌리에서 잊혀져 갔다. 우리의 역사의 슬픈 단면이다.

그러나 그의 의식은 살아 오늘의 덕촌리를 독립운동가 마을로 정착시키는 역할을 했다. 사람들이 속속 덕신학교를 찾아들게 하는 이유다. 아들, 며느리와 함께 가족이 나라에 몸 바친 대물림 현장이 6월의 열기로 후끈 와 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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