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칼럼] 한옥자 수필가

직업 덕분에 젊은이와 자주 대화를 나눈다. 주로 여성인데 딸 없는 나로서는 마치 딸과 나누는 대화처럼 최대한 상대의 입장이 되어보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서로 한계에 부딪힐 때가 자주 있다.

농경사회에 알맞았던 대가족 형태가 산업이 발달하면서 달라졌다. 젊은이는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 도회지로 떠나고 그곳에서 결혼하고 가정을 꾸렸다. 이런 변화로 시골을 지키는 역할은 조부모나 부모 몫이 되었다.

평생을 시골에 살아서 도회지의 자식이 같이 살자고 해도 손님처럼 드문드문 만난다. 가족 간에도 대화의 기회가 드물어 관계에 이상이 생긴 것이다.

집의 형태도 달라졌다. 시골은 땅이 넉넉해서 단독주택을 짓고 도시는 집 지을 땅이 귀해서 하늘을 땅 삼아 공동주택을 짓는다. 5년마다 주기적으로 실시되는 2020년 인구주택총조사에서 전국의 주택 비율 중 아파트 비율이 63%를 차지한 것을 보면 확연히 알 수 있다.

방의 크기와 숫자도 달라졌다. 일꾼을 두고 농사를 짓던 3세대 이상이 거주하던 시절에는 크기는 적고 개수는 많았다. 반면 2세대가 거주하는 도시는 2·3개의 방을 갖추거나 그 이상으로 많으면 부의 기준이 되었다.

용도도 달라졌다. 시골은 모처럼 손님처럼 오는 자식이나 창고나 허드레용으로 바뀌고 도시도 방을 서재나 개인 공간으로 활용하느라 부모가 와도 잠잘 방이 마땅치 않다.

남녀가 만나 가정을 이루고 자식을 낳아 양육하는 것을 당연한 줄 알았다. 양육의 역할에서 조부모의 역할도 매우 중요했다. 아기 엄마가 젖을 주면 돌보는 역할은 거의 조부모가 했다. 아주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던 삶이 방식이라 결혼, 출산을 그다지 무겁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제는 결혼과 출산 그리고 노인이 사회적 문제가 되었다. 새로 태어난 아이를 키우거나 나날이 병약해지는 부모를 돌볼 인력이 없어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누군가의 손에 돌봄을 맡겨야 한다. 대가족 시대에는 걱정할 필요가 없던 현상이다.

경제, 교육, 지역의 양극화가 심해지면서 중산층이 무너졌다. 경제가 불안정한 나라는 사회나 치안도 불안정하다. 국가가 튼튼하기 위해서는 중간계층이 많아야 한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나만 잘 살면 된다는 의식이 날이 갈수록 팽배하고 나 이외는 경쟁자가 되었다. 다투듯 도시로 향하고 결혼과 출산을 꺼리며 노인이 되어 병약해져도 요양시설 외에는 갈 곳이 없다.

출산한 여성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눈물 흘리는 모습을 보았다. 결혼하고 나서 부모님께 도움을 청하지 않고도 잘 살 줄 알았단다. 그러나 막상 아이를 낳고 나니 막막하고 낮에는 돌봄서비스라도 받으니 다행이지만, 우는 이기를 달래며 밤을 지새우는 것이 너무나 힘들단다.

이 상황은 가족의 도움이 매우 필요한 시점이다. 이럴 때 업무상 묻는 말이 있다. ‘부모님은 어디 사시는가, 아직 일하시는가,’세계 1위의 노인취업률의 나라이기 때문이다.

꼭 필요한 시점인데 도움의 손길을 내밀지 않으면 그것은 단절이며 고립이다. 진정한 자립은 스스로 하다가도 꼭 필요할 때 주위에 도움을 청하는 것이다. 도움 청할 대상이 부모여도 좋고 형제자매, 지인이어도 좋다. 내민 손을 기꺼이 잡아 주는 사람이 많다면 잘 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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