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목련] 정혜련 사회복지사 

조선 시대의 역관은 사신과 함께 타국에 파견되거나, 반대로 사신이 오면 왕과 대신들 앞에서 통역을 수행하였다. 이러한 역관은 사역원에서 전문적으로 양성되었는데, 이로도 수요를 충당하기 힘들어 지방에 외국어를 잘하는 관리를 파견하여 교육시킴으로써 부족한 인력을 충당했다. 사역원에서 교육받은 학생들은 3년에 1번 역과라는 과거를 보고 통역관이 되었다. 주 내용은 외국어 실력과 외교관으로서 갖추어야 할 소양을 보는 사서오경이다. 

과거에 합격하여 역관이 되면 그중에서도 실력에 따라 통사, 압물, 압마 그리고 타각부라고 불리었다. 그리고 역관이 된다고 해서 모두 외국에 나가는 것이 아니라 한 번도 나가지 못하는 사람도 있었다. 

조선 시대의 역관은 사회적으로는 중인 신분이었으며, 중인 중에서도 전문직으로 인정받는 역관과 의관은 대우가 더 나았다. 이들이 사는 집구조도 그들의 신분을 반영하는데, 서민주택과 달리 안채, 사랑채, 행랑체의 공간을 갖고 있고 서고와 사당도 갖추고 있다. 그러나 상류주택과 같이 행랑채가 독립되어 있진 않다. 역관 중 부유한 자들은 화려하게 집을 짓기도 했으나 이는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양반은 기술직에 종사하는 중인을 천시하였는데, 아이러니한 것은 그러면서도 아프면 의관에게 가고, 사신이 오면 역관이 없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경국대전에 따르면 여고간이 올라갈 수 있는 최고 품계는 정3품 당하관까지로 제한되어 있지만, 실제로 그 이상 올라간 사람도 있다.

역관 중 외국에 다니는 사람들은 인삼을 비싸게 팔거나, 중국의 경서나 약재, 비단을 사서 양반들에게 비싸게 팔기도 하고 명주실을 사다가 일본에 되팔기도 하면서 부를 축적하기도 했다. 대표적인 역관의 가문은 밀양 변씨의 변승업, 안동 장씨 장현, 김해 김씨 김근행, 우봉 김씨 김지남 등이 있다. 이들 가문은 세습적으로 역관을 많이 배출되어 자본축적에 매우 유리하였다. 이들은 엄청난 부가 있었지만, 신분의 제약으로 그만큼 외적으로 표시하지는 못했다. 

역관은 외국의 문물을 들여오는 창구역할을 하기도 했는데, 무기와 관련된 서책을 들여와 국방력에 도움을 주기도 하였다. 

18세기 후반 조선에 천주교 문화가 퍼지는 데 역관의 역할이 있다. 김범우라는 역관은 천주교 관련된 책자를 많이 가지고 와서 보급에 앞장서기도 했다. 그는 남인 학자들과 자신의 집에서 예배를 보다가 발각되어 유배 가서 죽어 순교자가 되었다. 순조 때 역관 유진길은 천주교에 입교하여 김대건에게 중국어를 가르치고, 브뤼기에르 주교를 조선 천주교의 책임자로 임명하게 하는데 주도적 위치를 담당한 사람으로 1839년 기해박해 때 순교하였다. 

중인이라는 신분의 제약에도 역관들의 재능과 뛰어난 문화적 소양은 양반에 뒤처지지 않았다. 성종 때 역관 최세진은 사성통해, 훈몽자회 등을 저술하기도 하는 등 양반들의 반대에도 당상관에 오른 인물이다. 역관 홍순관은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 지원군을 데려오는 과정에 참여하고 명나라 역사에 태조 이성계가 고려의 권신 이인임의 아들로 기록된 것을 고치는 일을 200년 만에 한 인물이다. 

자국의 이익에 예민한 국제정세에서 외교관으로서 특권만 이용하는 것이 아닌 국익을 위해 일한 성실한 외교관들이 많아지길 기대하며 조선 외교관의 삶을 찾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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