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의 창] 김성수 충북대 교수 

비가 내리는 듯하더니, 유월의 장마는 지루하게 칠월로 이어진다. 비는 늘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선다. 한꺼번에 우르르 몰려올 때는 홍수 등의 물난리를 부르고 간헐적 찾아오는 빗줄기는 메마른 땅을 적시지도 못하고 가뭄을 불러 온다. 그리고 땅 위의 모든 생명들을 말라죽게 한다. 늘 그렇게 때 되면 오고 가는 비는 익숙하면서도 낯선 존재이다.

오래 보아왔던 것들과 오래 들어왔던 것들은 익숙한 존재라 대개는 믿는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로 부터 거리를 두고 살펴보면, 나 혼자서 익숙하게 느끼고 그렇게 인지해 온 것들이 많다. 익숙함에는 익숙하다고 인지하는 것들 속에는 수 없이 많은 진실이 아닌 것들이 실제로는 우글거린다.

대개의 사람들이 무신경의 인지의 틀 속에 묻혀서 살아간다. 이러한 사회적 틀은 대리인이 아닌 권력을 가진 지배자로 조직을 운영하는 사람들에게는 아주 입맛에 딱 맞는 환경이다. 적당히 속이고 적당히 속아주는 척하는 관계에서 많은 것들은 암울한 거래로 이루어진다. 모두에게 아름다운(?) 세상인 것이다.

집을 짓는 데는 목수가 필요하다. 목수가 아닌 자가 목재를 다듬고 가공하면, 대들보도 석가레나 불쏘시개가 된다. 시공의 비전문가가 철근을 재단하고 콘크리트 벽을 치는 일은 위험천만한 일이다. 누구나가 마음먹으면 될 수 있는 것이 전문가가 아니다. 전문가는 그 일에 대한 경험과 일의 속성을 잘 아는 사람이다. 수 없이 많은 실패와 경험을 바탕으로 현상을 인지하고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이 전문가이다.

요즈음 학문의 전당이라고 일컫는 대학의 총장선거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참으로 낯설다. 대학을 구성하는 구성원들조차도 낯설어 어리둥절하게 멍한 경우가 많다. 대학의 총장을 직접 구성원들이 선출하는 방식이 되었든 간접방식이 되었든 선거라는 제도가 갖고 있는 본질적인 문제점을 그대로 보여주는 형태이다. 어찌보면, 총장선거만이 아니다! 줄반장 선거나 모임에서의 대표를 선출하는 것도 다양한 정치적 형태를 띤다. 대통령 선거도 지나고 지자체선거도 지나고, 이제 대학에서는 대학의 총장 선거에 열을 올리는 대학들이 있다. 충청권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어찌 보면, 선거처럼 낯설고 물선 것도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선거제도처럼 민주적이라고 하면서도 가장 민주적(?)이지 않은 제도 또한 없다. 대통령 선거와 지자체 선거 등은 당이나 어떤 조직으로부터 추천되고 검증된 후보들로 선택의 대상을 추천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대학의 총장선거는 대학마다 조금씩은 다르겠지만, 정치적인 인사들이 자천 타천으로 후보로 나선다. 그리고 그 제한된 후보들 중에 가장 타당성 있어 보이는 후보를 선택하라 한다. 강요된 선택이다! 강요된 선택이 민주적(?)이라니! 어떤 면으로 보면, 모 뾰족한 방법이 없는 듯하니,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저 대충대충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믿으며 강요된 선택에 체념성의 투표를 한다.

그렇게 선택된 대리인은 그 자리에 맞는 역할을 할 것이라 대부분의 사람은 기대한다. 그러나 실상은 그러하지 않은 경우가 더 많다. 선출된 자는 위임된 권한을 권력화하고 그 권력화는 선출된 자의 초심과 주변의 사람들로 인하여 현실로부터 멀어져가는 경우가 많다. 본질적인 대리인으로서의 역할보다는 개인의 영달에 더 매달리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참으로 익숙하면서도 낯선 것이 누구를 나의 대리인으로 선택하느냐는 익숙하지 않은 문제이다.

시간은 변화를 가져오고 그 변화는 시간의 강물을 흘러 보낸다. 물은 흘러가고 새로운 물이 들어오고 그렇게 시간은 세상의 물을 바꾸어낸다. 그러나 그 강에 아무리 많은 물이 흘러도, 그 물에 비친 하늘은 늘 변함없이 강물 위에 진실로 멈추어 서 있다. 강물은 흘러가지만, 강물에 비친 하늘은 흘러가지 않고, 사람들 삶을 바라다보고 있다. 수 없이 많은 시간이 흘러도 그리고 수없이 다양한 사람들이 그 물위에 비추어져도 그 강물에는 그 하늘이 멈추어져 있을 것이다. 세상에는 참으로 익숙한 듯 익숙하지 않은 존재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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