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최철원 국립괴산호국원 현충선양담당 

72년 전 그 치열했던 여름 전쟁은 끝났다. 6·25전쟁 초기, 대한민국은 전쟁발발 3일 만에 수도 서울을 빼앗기고 불과 두 달도 되지 않아 경상도 일부지역과 부산지역을 제외한 남한의 전 지역을 북한군에게 점령당했다. 북한군이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와 부산밖에 남지 않았던 위기에서 1950년 9월 15일 인천 상륙작전을 계기로 전세는 역전되기 시작했다. 전쟁에 전혀 대비하지 못했던 대한민국이 1953년 정전협정에 이르기까지 버틸 수 있었던 것은 미국을 비롯한 195만 유엔군과 90만 국군이 합심한 결과였다. 

6·25 참전 당시 유엔군은 전투파병 16개국, 의료지원 6개국, 총 22개국의 병력으로 구성되어 우리나라에 파병했다. 당시 참전국은 상당한 인명피해와 고통을 감수해야만 했다. 이 전쟁으로 전투에 참여한 195만의 유엔 참전용사들 중 4만 여명이 전사하고 11만 여명이 부상, 실종되었다. 우리 국군은 15만 명이 전사했으며, 13만 명이 실종되고 70만 명이 부상을 당했다.  '이름도 몰랐던 나라'를 수호하기 위해 쓰러져간 유엔 참전용사와 우리 호국영령들 덕분에 지금의 대한민국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1953년 7월 27일, 드디어 유엔군, 중국군, 북한군 대표가 참여한 휴전 조인문에 서명하며 전쟁은 중단되었다. 하지만 정전협정은 종전과 다르다. 누구도 승자가 되지 못한 이 협정 이후, 남북한은 72여 년간 각자의 상처를 끌어안은 채 세계유일의 분단국으로 남아있다.

우리는 이 6·25전쟁의 어려운 여건을 극복하고 10대 경제대국을 변화하였고 성숙한 민주화를 이루었다. 여기에 의미를 둔 우리 정부는 6·25전쟁에 참전한 유엔 참전국, 참전용사의 희생과 공헌에 감사하고 동맹국과의 우호협력을 강화하기 위해 지난 2013년, 정전협정일인 7월 27일을 '유엔군 참전의 날'로 제정하고 매년 정부기념행사를 개최하고 있으며, 국가보훈처 산하 각 기관에서도 자체 기념행사를 마련하여 시행하고 있다.

 6.25 72주년 행사의 일환으로 한국을 찾은 노병들, "서울 교통체증에 눈물이 다 났다. 한국이 이렇게나 발전했다는 모습이니까" 태양이라도 삼킬 듯, 혈기왕성했던 17세 소년은 저물어 가는 해처럼 앙상한 낯빛의 88세 노인이 돼 한국을 다시 찾았다.

캐나다인 로널드 존 포일은 "지난 70여 년간 내 머릿속에는 한국과 전쟁, 그리고 비극이라는 세 단어가 계속 맴돌았다"고 말하며 물을 한 모금 마셨다. 긴장과 흥분으로 그의 손은 가볍게 떨고 있었다. 손에 쥔 물잔 속의 물이 작은 파문을 만들었다.

72년 전, 그러니까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란 민족의 격랑이 일었다. 당시 대한민국을 위해 목숨을 걸고 전쟁에 뛰어든 유엔군 및 교포 참전용사들이 한국을 찾았다. 지난 23일 오전 3명의 캐나다 참전용사들을 서울의 한 호텔에서 만났다. 정복을 차려입고 나선 빅터 찰스 로버트 플레트(94), 존 마이클 몰나르(92), 로날드 존 포일(88)씨다. 그들은 "한국의 초빙에 놀랍고 영광스럽고 감사하다"고 입을 모았다.  

이렇듯 우리가 7월 27일을 기념하며 기억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국만리 195만 유엔 참전용사의 숭고한 희생과 헌신, 바로 그들이 지켜낸 한반도의 주인인 우리가 기억하고 지켜나가자는 것이다. 한반도의 안정과 평화, 그리고 통일을 이루게 될 그 날을 떠올리며 눈을 감는다. 모두가 함께 꿈을 꾸면 현실이 되리라. 해마다 보았지만 볼 때마다 가슴이 뛰는 22개 참전국기와 유엔기, 푸르른 묘역의 길 양 옆에 펄럭이는 깃발 앞에 다시 한 번 우리의 꿈과 희망, 감사의 마음을 내려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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