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을 열며] 곽의영 전 충청대 교수

인간은 누구나 살아가면서, 외로움이나 고독이라는 감정을 경험하게 된다.

따라서 이러한 감정의 본질은, 우리 삶의 실존적 명제(實存的 命題)가 되고 있다.

이에 우리는 그 본질을 제대로 헤아려 보아야 한다.

사전적 의미로 ‘외로움’과 ‘고독’은 별다른 차이가 없다. 하지만 철학적·심리적으로는 다르게 바라본다.

일반적으로 외로움이란 ‘홀로 되어 적적하고 쓸쓸한 마음이나 느낌’이다. 다시 말해 ‘아무것도 없거나, 있어야 할 것이 없어, 공허한 느낌이 드는 정서적 반응’이다. 흔히 사람들은 나 말고 다른 것에 의존해야 편하고, 그렇지 않으면 불안해 진다.

이런 현상은 타인과의 ‘관계 결핍’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이로써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어도 그들로부터 소외되고, 마치 이 세상에 오직 혼자 있는 것처럼 힘들어 한다.

특히 노년기엔 가까운 이들이 세상을 떠나면서, 허무감이나 허탈감에 빠진다. 게다가 병고(病苦)에 시달리면 더욱 외로워진다.

본래 인간은 혼자여서 외로운 존재다. 이는 실존적 외로움으로, 정서적 외로움과 사회적 외로움으로 확장된다.

이에 따라 외로움에는 고통이 따르기도 한다. 그래서인지 시인 정호승은 그의 시(詩) <수선화에게>서, “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 라고 읊조린다.

다음으로 고독(孤獨)은 ‘외롭고 쓸쓸한 감정의 상태’를 말한다.

물론 고독이 외로움과 비슷한 감정의 색깔이긴 하지만, 고독은 자유의지에 의한 자기의 선택이다. 하여 고독은 외로움과 달리, 나 스스로의 방을 만들어, 자기만의 공간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다. 그래서 삶의 의미와 가치를 찾으며, 고독을 즐기기도 하는 것이다.

이를 두고 미국의 신학자이자 철학자인 폴 틸리히(Paul Johannes Tillich)는 “혼자 있는 고통은 외로움이고, 혼자 있는 즐거움은 고독’이라 했다.

지금 이 순간, 고독하면 이양하(수필가·영문학자)의 수필 ‘나무’가 떠오른다.

「…나무는 고독하다./ 나무는 모든 고독을 안다./ 안개에 잠긴 아침의 고독을 알고,/ 구름에 덮인 저녁의 고독을 안다. 부슬비 내리는 가을의 고독을 알고, 함박눈 펄펄 내리는 겨울 아침의 고독을 안다./ 나무는 파리 옴쭉 않는 한 여름 대낮의 고독을 알고,/ 별 얼고 돌 우는 동짓달 한 밤의 고독을 안다./ 그러면서도 나무는 어디까지든지 고독에 견디고,/ 고독을 이기고 또 고독을 즐긴다.…」

이 글에선 나무를 의인화(擬人化)하여 관조(觀照)의 눈을 통해 사유(思惟)하고 있다.

글쓴이는 나무의 속성(屬性)을 인간이 본받아 할 덕성(德性)에 비유하고 있다. 즉 나무는 주어진 자리에서 고독을 견딜 줄 알며, 모든 친구들을 차별하지 않고, 두루 잘 지내라 한다. 이어서 자신은 ‘스스로 죽어서 나무가 되고 싶다’고 이야기 한다.

참으로 자기 성찰(省察)의 철학(哲學)과 의지가 깊이 담긴 글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주변 사람과의 관계가 소원해지면 외로워한다. 흔히 이런 경우 낯선 환경에서 혼자서 잘 적응하지 못하거나, 사랑하는 사랑과 헤어졌을 때 강하게 느낀다. 어쩌면 이는 홀로 있어서 외로운 것이 아니라, 혼자 있지 못해서 두려운 것이다.

그렇다면 차라리 외로움을 고독으로 승화(昇化)시켜보는 일이다.

고독은 의존적인 아닌 독립적 감정이어서 외롭지 않다. 때문에 자기 의지로 외부와 단절하여 나를 만나고, 사유(思惟)를 통해 성찰하며, 새로운 것들과 연결점을 갖는다. 그리하여 참된 삶의 의미를 찾으며 보다 더 자신의 성숙(成熟)을 도모한다.

아무튼 우리의 삶은 고독이라는 어둠 속에서 진정 내가 누구인지 스스로 알아가며, 이 넓은 세상에서 흔들리지 않고, 살아가기 위한 에너지이다.

그러기에 인간은 때로는 고독으로의 침잠(沈潛)이 있어야 한다.

저작권자 © 충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