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목련] 이향숙 수필가

저들도 잠이 오지 않겠지. 얼마나 덥고 습하면 이구동성으로 목청껏 소리 지를까. 싸우기라도 하는 것인지 한 치의 양보도 없어 보인다. 소나기가 지나가는 사이 잠시 멈춘 것일까. 고맙게 느껴지던 빗소리가 잦아들고 다시금 개구리들이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로 요란하다.

그들과 삶의 공간을 일정부분 공유했던 시절이 있었다. 마루까지 올라오는 것은 일상이고 한 방에서 동침하기도 했었다. 우물가에서는 그들이 목욕하고 있어도 스스럼없이 물을 떠 푸성귀를 씻었다. 바가지로 훠이훠이 저어서 한쪽으로 밀어내고 물을 마시기도 했었다. 두렵거나 징그러운 존재가 아니었다. 적어도 시골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던 이 사람에게는 동무나 진배없었다. 그때는 그랬으나 이제는 삼복더위에도 창문을 열기가 두려울 만큼 소음으로 느껴진다. 

아득한 추억 속 이맘때가 떠오른다. 늦둥이로 태어난 덕분에 오누이처럼 자라던 조카들이 있었다. 방학은 주로 우리 집에서 지냈다. 조카들은 짓궂은 동네 삼촌들을 따라 하루 종일 들로 뛰어다녀 땀범벅이 되어 들어왔다. 저녁이 되자 작은 조카가 울음을 터트렸다. 개구리를 잡으러 가야 한단다. 잡았다 놓치면 밤에 찾아와 복수한다는 삼촌들의 농을 철석같이 믿고 공포에 떨었다. 아무리 달래도 소용이 없었다. 그날 밤 들렸던 개구리 울음소리는 어린 조카에게는 위협적인 소리로 자신을 해치러 오는 개구리 부대의 군가쯤으로 들렸을 것이다. 

아이들 어릴 적 시골 마을에 들어선 아파트에서 살게 되었다. 자연이 주는 풍요는 덤으로 얻었다. 아이들은 놀이터에서 모래를 갖고 놀거나 텃밭에 앉아 흙장난하기 일쑤였다. 사내아이들이라 그런지 겁없이 지렁이도 만져보고 메뚜기와도 친구가 되었다. 작은 개구리는 어찌나 앙증맞은지 손바닥에 올려놓고 무슨 할 말이 그리도 많은지 종알대던 모습이 떠오른다. 한참을 그렇게 놀다가 엄마에게 돌아가라며 놓아주던 때가 엊그제 같다. 이제는 성인이 되어버린 아이들의 추억 속 한 페이지에도 개구리의 울음소리가 그려져 있을까. 

삭막한 빌딩 숲에 자연 친화적으로 아파트 정원에 마련한 인공폭포 덕분에 개구리들이 터를 잡고 살아간다. 열대야로 뒤척이는 요즘은 창문을 열기가 두려웠다. 개구리 울음소리가 소음으로 들려 잠을 청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어미 몸에서 알알이 쏟아져 나와 인고의 시간을 보내다 개구리가 되기까지 자신의 삶을 노래하건만 소음으로 치부했으니 나의 이기심이었다. 시끄럽던 울음이 어린 시절의 추억과 개구리의 삶을 이해하다 보니 노래처럼 들린다. 멀뚱거리다가 은근히 눈을 감고 까무룩 잠이 들려는 순간 자장가처럼 느껴진다. '어여 자자' 하시던 할머니의 음성이 귓가에 맴돈다.

오늘은 잊고 살았던 두메산골의 여름밤에 몸을 뉘인다. 모깃불을 피워놓고 안마당에 멍석을 깔고 하늘을 올려다보면 별빛이 쏟아지는 것 같다. 삶은 옥수수나 감자를 먹으며 도란거릴 때 배경 음악처럼 들려오던 개구리 울음소리가 그리움이었는데 한동안 그것을 잊고 살았다. 마음 한 켠 미안함이 일어선다. 그리움은 오늘을 살아갈 수 있는 디딤돌이며 내 혈관에 흐르는 부모님의 사랑이다. 그런 날들로 채워진 일기장 같은 진솔함이 고맙다. 우리의 아이들도 개구리 울음소리가 소음이 아니라 노래이며 자장가로 들리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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