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혜련 사회복지사

일 년 중 가장 더운 8월은 온 국민이 산과 바다로 떠나는 휴가철이다. 이런 8월의 중간에 있는 8·15 광복절은 들뜬 마음을 잠시 멈추고 국가를 위해 희생한 분들을 기억하게 한다.

각 분야 많은 민족 지사 중에서도 장덕준 선생은 최초의 순직 기자이며 청년운동가이자 사회운동가이다.

일제 강점기 언론은 철저하게 총독부의 검열 아래 있었는데 당시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몇 가지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조선일보는 1920년 8월 20일 사설에서 미국 사찰단의 우리나라 방문을 기회로 서울과 평양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나 경찰과 충돌한 사건이 있었는데 이를 다뤘다는 이유만으로 발매금지 및 압수처분을 당하고 그해 8월 27일부터 9월 2일까지 유기한 발행정지 처분을 받았다. 그리고 바로 정간이 끝난 이후 9월 5일 사설에서 문화정치라는 허울을 쓰고 언론을 탄압하는 일제를 통렬히 비판했다는 이유로 무기한 발행정지 처분을 당했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경영난을 겪게 된다.

동아일보는 창간 2주 만에 만세 소요를 기사로 내보내 압수 당하고 그 이후에도 기사 삭제는 일상이 됐다. 정간과 기사 삭제의 이유는 총독부를 불신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장 선생은 1920년 4월 동아일보 창간에 힘을 보태며 논설위원이자 통신부장 겸 조사부장을 맡았던 언론인이다. 기자로서 그의 삶은 1914년 평양매일신문 한국문판 주간으로 시작됐고 1917년에는 일본 동경의 한국인 YMCA 부간사로 청년운동과 사회운동에 힘을 쏟았다. 행동하는 기자였던 그는 건강이 좋지 못 한 와중에도 홋가이도에 직접 가 한국인 노무자들의 실태를 살펴보기도 했다.

그는 동아일보 창간 다음 날인 4월 2일부터 4월 13일까지 '조선소요에 대한 일본여론을 비평함'이라는 논설을 통해 조선자치론과 일시동인론으로 삼일운동을 왜곡한 일본언론을 비판했고 특파원으로 중국 북경에 건너가 조선의 독립요구를 알리기 위해 노력했다.

일제의 탄압으로 신문이 정간 중일 때 홍범도 장군의 봉오동 전투에 패한 후 만주의 훈춘에서 일본군이 조선인을 학살한 사건이 일어났고 이 소식을 들은 장 기자는 현지에 단신으로 달려갔다. 당시 폐병으로 혈담까지 토하는 상태였으나 비인간적인 참혹한 진실을 알리기 위한 그의 열정을 꺾지는 못 했다. 종군기자로 일본 허가를 받아 간도에 도착한 장덕준은 대학살의 참상을 취재하던 중 일본인에게 불려간 뒤 실종됐다.

이 사건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발간한 독립신문 1921년 10월 28일자에 '장덕준씨 조난논평'으로 기사화됐다. 이 기사는 그가 일본군에게 암살당했음을 알렸다.

대한민국 정부는 언론인으로서 그의 공을 기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고 1971년 기자협회 기장을 제정하며 기념 메달 뒷면에 장 선생의 얼굴을 새겼다. 장 선생의 행적을 통해 우리는 '진실'을 말하는 것이 얼마나 강한 것인지 알 수 있다. 그가 일제 탄압에 맞서 싸운 무기는 '펜' 하나였다. 그는 자신이 보고 들은 진실을 찾아 확인하고 그것을 알렸다. 장 선생이 기자로서 일본군의 만행을 취재한 후 보낸 첫 소식은 '빨간 핏덩이만 가지고 나의 동포를 해하는 자가 누구이냐고 쫓아와 보니 우리가 상상하던 바와 조금도 틀리지 않는다'이다.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이 모든 것이 앞선 이들의 국가와 민족에 대한 사랑과 희생의 덕임을 잊지 않는 8월이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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