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양남현 국립괴산호국원 현충선양담당

1907년 8월 1일 대한제국의 군대가 '공식적'으로 해산됐다. 여기저기서 대한제국 군인들과 일본군의 시가전이 전개됐다. 이 와중에도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는 정상적인 훈련과 일상생활을 했다. 하지만 이러한 생활도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일제는 1909년 9월 대한제국 군부의 숨통을 끊고 우리나라를 병탄하는 토대를 만들기 위한 작업으로 육군무관학교를 폐교하려 했다.

1909년 8월 2일 학교장 이희두가 "황제 폐하가 군부를 폐지하고 무관학교를 폐교한다는 칙령을 내렸다"면서 칙령을 봉독했다.생도들은 통곡했다.

하지만 엄혹한 현실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총 45명의 육군무관학교 마지막 생도에게 일본으로 갈 것을 명했으며, 이들 가운데 김영섭만이 일본으로 가는 것을 반대했다.

총 44명의 육군무관학교 생도는 일본으로 가기 위해 지식과 신체검사를 비롯해 적성검사를 차례로 받고 두 명을 제외한 42명이 일본으로 가는 배를 기다렸다.

1909년 9월 3일 생도들은 일본 육군유년학교 생도들과 같은 정복을 입고 대한제국 소속임을 표시하는 오얏꽃 모표와 분홍색 금장을 달고 현해탄을 오가는 배에 조국의 미래를 짊어지고 올랐다.

일본으로 가는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 마지막 생도 중 성적 제1등은 유명한 소설가로 알려진 염상섭의 큰형이었던 염창섭이었다.

물론 이들 가운데 발군의 실력을 발휘한 생도는 따로 있었다. 홍사익이었다. 그는 일본인들도 입학이 어렵다던 일본 육군사학관학교와 육군대학을 거쳐 일제 패망 시 일본군 중장에 오른 인물이었다.

조국을 외면했던 대가로 그는 1946년 A급 전범으로 처형되는 운명을 맞이하게 됐지만 일본 육사 시절 그가 보여주었던 실력은 일본인들도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1909년 9월 7일부터 대한제국 생도들은 일본 육군사관학교의 예비학교인 육군중앙유년학교에서 '극일(克日)'한다는 자세로 한국학생반으로 편성돼 훈련받았다.

1910년 9월 1일 대한제국육군무관학교 생도들은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 대한제국을 일본이 병탄한 것이었다. 이른바 경술국치다. 한일병합조약 제1조 '대한제국 황제는 일본국 천황에게 모든 권한을 완전히 그리고 영원히 양도한다'라고 돼 있듯이 이제 무관학교 생도들은 더 이상 대한제국의 상징인 오얏꽃 모표를 달수 없었으며, 한국학생반도 없어졌다.

훗날 한국광복군 총사령관이 됐던 지청천과 연해주에서 독립운동을 강렬하게 전개했던 김경천, 전범으로 처형된 일본군 중장 홍사익, 대한민국 초대 육군참모총장이 됐던 이응준은 요코하마에서 "독립투쟁을 위해 신명을 바치겠다"고 맹세했다.

하지만 이들 가운데 2명만이 독립운동에 자신을 바친다.1910년 8월 29일, 우리는 이날을 경술국치일이라고 하지만 정작 이를 기억하는 이들은 많지 않다.

그 시대의 모든 대한인들은 그에 대한 책임이 있다. 이날을 기억하고 소환하지 않는다면 후대에 또 다른 경술국치의 치욕을 초래할지도 모른다.

기억은 역사의 주인이다. 8월 29일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비롯한 많은 독립운동 단체가 해마다 이날을 기념하는 것도 아픈 기억을 다시 한 번 끄집어내어 보다 단단한 굳은살의 역사를 만들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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