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최철원 국립괴산호국원 현충선양담당 
 
엊그제 단풍 소식이 전해진 듯싶더니 가을을 더욱 재촉하고 있다. 113년 전 가을도 그리했을까! 일제 침략의 서슬펀 야욕은 온 조선을 삼켜가고 있었으며 일부 지식인들을 제외하고 조선의 백성은 전해지는 구전으로 조선 을사 5적신의 횡포와 더블어 저물어가는 조선을 보고 있었다. 

이러한 야욕에 맞서는 안중근 의사로 나이 113세가 된다. 이런 야욕의 중심에는 바로 일본의 영웅 이토 히로부미 추밀원 의장으로 조선은 이토를 원수 여기고 조선 구국의 열사들은 1909년부터 앞을 다투어 제거하고자 했다. 여기 동참자로 안중근, 우덕순, 조도선, 유동하, 유승렬, 김성화, 탁공규 등 7인으로 의거의 진행은 순탄치만 않았다.
이토가 어느 역에 내릴지가 정확하지 않아 의거 당일 2개 조를 편성 1개 조는 우덕순과 조도선은 체가구역에 안중근은 하얼빈역에서 공격하기로 변경해 진행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안중근은 사전에 예행연습을 통한 이토 히로부미의 동선을 파악했던 것이고 일본인 행세를 하기 위해 일본인 머리로 잘랐다.

당초 러시아 당국은 이토의 일행의 안전을 위해 하얼빈 역 현장을 엄격히 통제할 예정이었지만 일본 총영사 가와카미 도시히코가 "많은 일본인들이 역 앞에서 이토 일행을 환영할 수 있도록 허용해 달라"고 요청해 경호를 강화하지 않았다.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15분 하얼빈 역에 도착해 차내에서 약 20분 정도 러시아 재무상인 코콥초프와 대화한 후, 그의 권유에 따라 명예 사령관으로서 러시아 수비병을 사열하기 위해 열차에 내렸다.

그가 수행원의 안내를 받으며 러시아 군대 앞에 막 지나가는 순간, 안중근이 총알을 발사했다. 총 7발 중 여섯발을 발사하고 한발은 자살용으로 남겼다. 

과연 이토 히로부미가 적중하였을까, 안중근 자신은 몰랐을 것이다.

안중근은 그 다음 에스페란토어로 "코레아 후라(한국만세)!"를 두어 차례 외친 뒤 러시아 헌병에게 잡혔다. 이토는 "당했다"라고 한마디 했다. 차내로 옮긴 이토 히로부미는 잠시 신음하다 피격 30분 뒤인 오전 10시경에 사망했다.

일본인에게 이토 히로부미란 메이지 유신정부(1866년) 성립 후 정계에 투신, 외국사무국 판사, 효고현 지사를 역임하였으며, 영어에 능통해 화폐제도, 은행제도 조사차 미국에 파견되어 돌아온 후 유신정권의 최고지도자로 군림한다.

초대 내각총리대신을 역임 이후 추밀원 의장에 취임해 1905년 11월 특명전권대사로 대한제국에 부임한 뒤 고종과 조정대신들을 강압해 을사늑약을 체결함으로써 대한제국의 외교원을 박탈하고 내정을 장악, 한국 병탄(倂呑)의 기초공작을 수행한다.

1907년 이완용, 이근택, 이지용, 박제순, 권중현 등 을사오적을 중심으로 한 친일 내각을 구성하고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세계에 알리고 이를 파기하고자 한 헤이그특사사건을 빌미로 고종을 강제 퇴위시킨다.


이러한 대한제국의 황제를 강제 퇴위시킨 죄, 정권을 강제로 빼앗은 죄, 식민화를 꾀하며 동양의 평화를 깨뜨린 죄 등 15가지 조항을 들어 그를 동양의 평화를 해치는 원흉으로 규정하고 조선에서는 제거를 준비했던 바로 그 사람이다. 

그의 장례는 11월4일 하비야 공원에서 국장으로 치러졌다 한다. 중국 혁명의 지도자인 쑨원은 "공은 삼한을 덥고 이름은 만국에 떨치나니 백세의 삶은 아니나 죽어서 천추에 드리우리 약한 나라 죄인이요 강한 나라 재상이라 그래도 처지를 바꿔 놓으니 이등도 죄인되리"라고 대한국인 아닌 중국인조차도 추앙하고 있다.

열악한 환경에서도 짧은 32세의 나이로 행동에 옮긴 안중근 의사의 의거는 조선민족의 자랑이자, 세계 제국주의 야욕을 호시탐탐 노리는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사건으로 우리는 안중근 의사의 의협심이 강한 행동에 다시 한번 감사의 마음을 갖고, 이 어려운 환경을 잘 이겨내는 대한민국의 국민이 됐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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