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시평] 김윤희 수필가·전 진천군의원

22㎝, 70㎝, 450g 그가 가지고 있는 신체조건이다. 머리가 없다. 얼굴도, 손발도 없다. 그러나 살아서 펄펄 뛰고 구른다. 푸른 초원을 종횡무진이다. 가죽옷을 걸치고 있다. 요리조리 둘러보면 오각형 무늬가 12개요, 육각형 무늬도 20개나 보인다. 한 손으로 들어 올려도 거뜬하다. 모난 구석이 하나도 없다. 속이 없다. 둥글둥글 사람 좋은 형상을 하고 있는데 성깔은 호락호락하지가 않다.

신주 모시듯 받드는 한편, 어르고 달래며 잘 보여야 한다. 얼렁뚱땅 잘 보이려 하다간 큰코 다친다. 혼자 잘났나고 우쭐대는 꼴은 절대 보아주지 않는 습성이 있다. 사람 마음을 들었다놓았다 마음대로 쥐고 흔든다. 그의 발치를 따르며 울고 웃고, 때로는 발을 구르며 가슴을 치기도 한다. 열광의 도가니다. 세계인의 마음이 소통되고 있는 현장을 본다. 며칠 나도 그에 빠져들었다. 정체가 뭘까. 어떤 연유에서 비롯된 일인가.

그가 우리나라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1882년 영국 군함 플라잉 피시가 인천의 제물포에 들어올 무렵으로 본다. “미치광이 같은 영국인 무리가 한데 모여 황소 오줌보같이 생긴 무언가를 이리저리 차고 논다. 이 물건이 나무 막대기로 지어놓은 사각의 틀 안으로 들어가면, 그들은 매우 만족해하고 반대로 매우 상심하기도 한다.”라는 말이 기록으로 전해지고 있다. 축구의 시발점이다. 당시 우리는 서양인을 보고 푸른 눈을 가진 도깨비로 인식할 때다.

또 다른 기록에 의하면 그 훨씬 이전부터 우리나라는 이미 축구와 비슷한 형태의 경기를 즐겼던 것으로 나타난다. 축국(蹴鞠)이다. ‘鞠’자가 가죽공을 뜻한다. 신라 시대 김유신과 김춘추가 젊은 시절 축국을 하다 김유신이 김춘추의 옷고름을 밟은 인연으로 처남과 매제 사이가 된 일화가 그것을 말해준다.

축구의 기원이야 어찌 되었든 2022년 월드컵 축구는 우리나라를 또 한 번 한마음으로 뭉치게 했다. 지구촌을 거대한 축제의 장으로 이끌어 냈다. 세계인의 마음을 활짝 열고 소통하게 했다. 그 작은 공 하나의 위력은 대단했다. 우리나라는 16강 진출이 꿈이었다. 꿈같은 16강 진출, 그러나 꿈이 아니었다. 아니, 꿈이 이루어진 것이다. 11명의 선수뿐만 아니라 12번째의 선수인 우리 국민의 응원이 간절히 원하여 이루어낸 결과다. 한 경기 한 경기 최선을 다해 밟아간 여정 자체가 꿈을 이루어가는 과정이 아니었나 싶다.

스포츠는 특히 단체전에서는 개개인의 뚜렷한 기량보다는 선수들끼리 절묘하게 주고받는 마음의 조화로움이 큰 시너지효과를 낼 수 있음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본 것을 또 본다. 또 보고 또 보아도 감동이다. 이기고 진 것, 결과에 집착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 그것으로 되었다.

주장 손흥민의 마지막 수십 미터 단독 전력 질주가 눈물겹다. 대여섯 명이 따라붙는 틈바구니로 황희찬을 향해 날린 어시스트, 절묘하게 받아 골로 연결한 황희찬, 그 짧은 시간 그들은 서로 믿음이 있었다. 아무리 기량이 뛰어나다 해도 받아서 연결해줄 자세가 되어있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아무리 받아줄 마음이 되어있다 해도 제대로 어시스트해주지 않으면 이 또한 소용이 없다. 승패의 결과는 중요하다. 그러나 결과보다는 그 과정이 더 중요하다.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은 그걸 안다. 혼신을 다한 태극전사에게 아낌없는 박수와 눈물로 위로를 보내는 이유가 거기 있다.

겨울이 깊어간다. 정치 경제적으로 더 힘든 시기다. 우리나라 정치권에는 지금 잘난 사람이 많다. 각자 너무 잘 나서 협업이 없다. 내 주장이 바로 법이라는 인식이다. 나를 내려놓고 추위에 떨고 있는 서민경제를 우선해 줄 수는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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