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병익칼럼] 오병익 전 충청북도단재교육연수원장‧ 아동문학가

“노르스름한 명자열매를 따서 앞치마에 담았습니다. 너붓하게 썰어 건조기에 말렸다가 흰눈이 수북이 쌓인 겨울에 차를 끓여 볼 생각입니다.”(함무성 수필 ‘명자나무 열매)

“덜 익은 모과를 딴다. 반가운 사람이 온다는 전화 받고 / 아직은 나무에 매달려서 자신의 자태를 익혀야할 즈음인 모과를 딴다. / 제일 크고 실한 놈으로 골라서”(김호숙 시 ‘덜 익은 모과를 딴다’)

명자열매와 모과는 다른 듯 닮은 데가 많다. 저마다의 노랑을 절묘하게 담아낸 것 말고도 밖에서 잔뜩 얼어 돌아왔을 때 착 달라붙는 향부터. 이제 조금 크고 도톰하게 썰어 말린 명자열매와 가장 속살 꽉 찬 모과로 골라 수확해놓고 기다리는 두 분(함무석·김호숙)작가의 찻감을 반반씩 섞어 듀엣(duet)으로 우려낼 차례다. 차 이름은 뭐라고 질까. ‘여차(與茶)·야차(野茶)’또 드잡이 않겠나. 협차(協茶)가 좋으련만.

◇하수 싸움

아득바득 열매 몇 알을 비운 늙다리 나무도 한해 마무리에 든다. 긴 줄 끝이 보이지 않던 성안길 식당마저 ‘저녁 내 우리 한 팀(여섯)받아 얼마의 이문 남겨 긴 겨울을 날까’ IMF보다 빨갈 거라는 위험신호가 세밑 경기로 하듯, 물가도 주가도 부동산도 무역도 환율도 그렇고 금리와 회사채 시장 할 것 없이 사방팔방 앓는 소리다. 생산·소비·투자가 바닥을 치는 판인데 나라 곳간이라고 멀쩡하랴.

하지만 민생이 아사(餓死)직전으로 거덜 나거나 말거나 2023년 본 예산안 법정시한까지 넘겨버린 채 정치 문맹을 드러내지만 연봉 약 1억5000만원 이상 고소득(일당 40여만원)에 공무출장 및 입법지원·입법 정책 개발·의원 보좌 직원 지원· 특활비 등 지출항목을 헤아리기 어려운 베짱이다. 새벽부터 구슬땀 범벅인 일용 인부와 하루 수천km 택배기사 발품을 읽지 못하고 자기 팬덤의 자기 팬덤에 의한 자기 팬덤 만을 위한 계륵에 빠지니 피 같은 혈세가 너무너무 아까운 거다.

최근 미국 한 여론조사 결과 세계 주요국 중 정치 분열 최악 국가로 우리나라를 꼽았다. ‘장군멍군·당리당략·자중지란’ 등 갈등과 반목은 기고만장하다. 진짜 얼마만큼 불 맛을 봐야 제 정신 들려나. 어느 쪽 말이 옳고 그르든 당기고 끌려가며 머리를 맞대는 게 순리다.

◇스포츠의 매력

총알을 맞고 또 맞아도 스러지지 않는 영화 주인공 같은 카타르 월드컵 태극전사 투혼 덕분에 축 쳐진 국민 기압이 모처럼 한껏 올랐다. 한국 대 우르과이 후반 29분 교체 선수 이강인 득점 골로 까무러칠 뻔했다.

2차전(가나)에서 2골(멀티)을 따낸 조규성의 경기 직후 인터뷰를 보자, “솔직히 별거 없는 선수”였다며 자신을 낮췄다. 펄펄 날던 야성과 달리 ‘으쓱’하지 않은 겸손이야말로 고장난 정치를 훈수한 스포츠 매력일 듯싶다. “호날두의 크로스·코너킥?” 뭔 대수랴. 손흥민의 어시스트가 황희찬 발로 마무리 골=16강 신화를 썼으면 됐지. 비록 브라질에 4골을 내줬지만 후반 백승호 중거리 슛 성공은 세계 축구의 샛별로 떴잖은가. 있는 걸 모두 쏟아부었다. 참 장하고 고맙다. 이참에 정치 골문까지 활짝 열려야 할 텐데….

저작권자 © 충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