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별칼럼] 박종순 전 복대초 교장·시인

2017년 윤동주 탄생 100주년을 맞아 충북시인협회에서는 윤동주 시인 생가를 방문하고 백두산에도 오르기로 하였다. 필자는 강력히 주장하여 일정에 없던 동주 시인의 묘소를 참배하자는 의견을 내었다.

시인의 묘소는 용정시 외곽 동산 공원 공동묘지에 있어 산길을 한참 걸어 올라야 했다. 다행히 막걸리와 포를 사서 묘소 앞에 머리 숙이고 참배하니 더할 나위 없는 감격의 순간이었다. 단지 봉분이 그리 탄탄하지 않고 덮고 있는 잔디도 드물어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5년이 흐른 올여름 묘소의 잔디가 걱정되어 해란강 물이라도 길어다 뿌려주고 싶은 ‘시인의 잔디’라는 시를 발표하기도 하였다.

역사의 선물일까? 동주 시인이 흠모하고 따르던 정지용 시인의 고향 옥천에서, 선사문화의 존재가 처음 알려진 후 100년 만에 학술 대회가 개최된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고고학을 비롯 세 개의 박사학위를 받고 세계적으로도 인정받는 이융조 박사가 ‘옥천 안터 고인돌 · 선돌의 문화사적 접근’이라는 주제로 기조 강연을 하신다기에 기대를 한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5000년 전 후기 신석기 시대의 고인돌이라는 무덤에 관한 내용이라서 속으로 놀라고 말았다. 발표가 진행되어 갈수록 참가자들은 먼 조상들이 고안해 낸 고인돌과 선돌이 품고 있는 스토리를 상상하며 특히 무덤을 돌로 과학적으로 쌓고 선돌까지 세운 아름다운 지혜에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생명이 다하면 저마다 다시 흙으로 돌아가련만 차마 이별의 아픔과 슬픔을 달래려고 아니 잊지 않으려고 역사 이전 선사시대 사람들은 돌을 사용하여 영원성을 심어 놓았으니......

선사시대에 땅 위에 자연석이나 그 일부를 가공한 큰 돌을 하나 이상 세워 기념물 또는 신앙대상물 등으로 삼은 돌기둥 유적을 선돌이라 한다. 고인돌(支石墓, dolmen)과 함께 대표적인 거석문화(巨石文化)의 하나인데 우리나라의 고인돌 유적은 전 세계의 절반을 차지하며 일부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고 한다.

그날 학술발표회는 오후여서 오전에 동이면 석탄리 안터마을로 가서 발표 대상인 고인돌과 선돌을 직접 만나 보았다. 지금은 넓은 잔디정원 가운데 나란히 자리하고 있지만 1977년 발굴 당시는 서로 210미터 간격을 두고 마주보고 있었다고 한다. 탁자식 고인돌로 두 개의 굄돌 위에 얹은 덮개돌은 마름모형으로 전체적으로 거북이 모양을 이루고 있었다. 8차에 걸친 마지막 발굴 당시 맨 바닥층에서 두 눈과 약간 벌린 입을 표현한 얼굴돌이 하늘을 향한 채로 묻혀 있어 더욱 신비롭고 특이한 상황이 추정되는 것이었다.

이 박사는 기조 강연에서 ‘이 얼굴돌은 사람을 상징한 초상화로 여성을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하였으니 학계의 관심은 더욱 뜨겁고 필자도 마음이 설레었다. 옥천지방에 돌이 많았고 얼굴 모양의 돌형상을 찾아 함께 묻어 주었으니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발표를 다 듣고 우아하게 마주 서 있던 선돌에서도 특이한 면을 관찰했는데 195센티 크기의 형상에 아랫부분이 둥근 원 형태를 보이며 불룩하게 돌출한 면이 있어 아기를 잉태한 여인이 죽어 고인돌을 세운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에 더욱 내 가슴이 두근거리며 숙연해졌다.

그 먼 옛날 5000년 전에 누가 이 고인돌을 세웠을까. 또 선돌까지 나란히 세운 것은 영원히 잊지 않고 이별을 아쉬워한 그 누구인지 애절한 러브 스토리가 유추되는 것이다. 그 옛날에도 생명을 소중히 하여 아기를 잉태한 상태로 생을 마치었기에 고인돌로 안식처를 마련해주고, 선돌을 세워준 것은 아주 뜻깊은 생명 존중이 아니겠는가? 인생은 사랑과 이별이다. 선사시대나 역사시대인 지금이나! 오천 년 전 여인을 만나러 그곳으로 또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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