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광장] 유인순 한국커리어잡스 대표이사

오랜만에 환한 답장을 받았다. ‘허걱’이라는 단어 다음에 촐랑대는 이모티콘이 빙그르르 돈다. ‘아, 기분이 좋다는 얘기구나’라고 생각하니 가슴이 짠했다. 그동안 필자가 전달해준 선물이라는 것은 쌀이나, 김치, 라면 등이 고작이었다. 취약계층 청년들이 생존에 꼭 필요한 것, 굶지 않고 견딜 수 있는 그것들처럼 귀한 게 없다고 생각했다. 때로는 그것을 통해 만남을 꺼리기도 하는 그들에게 다가갈 구실로 삼기도 했다.

천안시청 사회복지과에서 지원하는 구호 물품을 보호종료 청년들에게 전달하면서 멋쩍어하는 그들의 모습을 대면하는 게 때로 민망할 때도 있었다. 부모 밑에서 있었다면 쌀통이 어디 있는지조차 알 바가 아닌, 그런 청년들이 쌀과 김치를 구해야 하고, 때로 그것을 얻어먹어야 하는 상황에 내몰린 것이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도 있었다. 그러나 녹원회에서 보내준 가방 샘플 사진을 보자마자 그들이 보내온 환호와 감동의 표시는 그간의 미안함을 눅였다.

남편의 월급 만으로는 세 아이 키워내며 두 분 시부모님의 병시중을 하기에 턱도 없어서, 시골 전답을 팔아가며 버티던 시절에, 뜻밖의 선물을 받았다. 시숙 어른이 문병을 오시면서 핸드백과 여성잡지 한 권을 사 오신 것이다. 그때까지는 어떤 가방을 들고 다녔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결혼 후 농사꾼으로 살다 보니 곡식을 내다 파느라 주로 헝겊 가방이나 비닐봉지를 들고 다녔던 것 같다. 그 후에는 집안에 환자가 생겨 가까운 시장에 가서 생필품을 사들고 뛰어 들어오는 게 전부여서, 이쁜 가방 같은 것은 필요치 않았다. 더구나 병원비로 늘 돈이 궁하던 시절이라 자신을 위한 어떤 것도 사 본 적이 없던 터였다.

특별히 나갈 데가 없어서 국내 유명 브랜드의 핸드백을 메고 설거지도 하고, 보드라운 가죽 냄새를 맡아가며 햇빛 환한 마당을 서성이기도 했다. 존재 자체를 몰라 소망조차 하지 않았던 그 고급 가방은 그 후로 몇 년 동안 안방에서 필자와 함께 화려한 외출을 꿈꾸었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미인대회인 미스코리아 수상자들이 만든 사회공헌 단체인 녹원회에서 천안지역 취약계층 여성을 위해 가방을 기증했다. 그룹홈, 보호종료 청년, 미혼모 시설 입소자, 성폭력 피해입소자, 여성 장애인 등 20대 취약계층 여성들을 선정하여 가방을 배분하였는데, 의외로 가방을 받는 여성들의 만족도가 높았다고 한다. 쌀이나 라면과 비교할 수 없는 선물의 품격이라고나 할까. 더구나 아름다운 여성의 대명사로 불리는 미스코리아들이 기증한 가방이라니, 그것을 받는 어린 여성들의 상상력은 무대 위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그녀들을 보듯 했으리라.

가방을 전달하기 위해 같이 식사하는 동안, 앙증맞은 클락백을 장식품처럼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처음 받아보는 ‘찐 크리스마스 선물’이라는 말에, 존경하는 시아주버님이 특별히 골라주신 삼십 년 전 가방을 떠올렸다. 상상하지 못했던 선물을 받았던 그 날, 나의 처참한 인생에서 그런 가방 하나쯤은 들어도 괜찮다는 허락을 받은 것처럼, 대접받았던 것 같은 느낌, 밝은 모습의 그녀도 같은 기분이리라.

때로 쉽게 살 수 없는 물건을 선물 받았을 때, 속물처럼 행복하다. 더구나 선물을 준 대상이 존경하거나 친애하는 사람이라면 더 기쁘지 아니할까. 녹원회에서 만들어준 가방, 별로 기쁠 일 없이 살아오던 취약계층 여성들에게 그것은 따뜻한 위로였고 든든한 응원이었다. 그런 것쯤 소망하며 살아도 된다는 무언의 허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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