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시평] 김윤희 수필가·전 진천군의원

"밥 한 끼 같이 하시지요." 초대를 받았습니다. 진짓상 한 상 마련한다 합니다. 오랜 세월 밥을 연구하고, 고려, 조선시대 음식문화 연구에 열정을 쏟은 '진지박물관' 관장이 상을 받고 턱을 낸다 합니다. 기꺼운 일입니다. 나붓나붓 발걸음이 가볍습니다.

음식을 연구한 사람답게 그녀가 준비한 밥상은 특별했습니다. 일반음식점이 아닌, 충북콘텐츠코리아랩 세미나룸에 마련한 것이 그랬고, 춤과 음식에 관한 영상을 통해 음식 문화 역사로 분위기를 깔아놓은 발상이 그랬습니다.

코스요리로 맨 먼저 '동아누르미'가 나오고 이어서 '궁중 대하찜', '칠보산도', '꿩 잡채', '만이창면과 방자구이'가 차례로 나온 다음 '피낭시에 홍차'로 마무리를 했습니다. 고려시대 음식을 재현한 것이라 합니다. 이름도 생소했지만, 조리법 또한 하나하나 손이 많이 가는 것이었습니다. 그 정성을 함부로 먹을 수가 없습니다. 눈으로 보고 혀로, 마음으로 음미하며 먹게 됩니다. 음식이 나올 때마다 일일이 해설을 곁들여 주니 우리나라 식문화에 대한 가치가 돋보입니다. 대체로 슴슴한 것이 자극적이지 않고 은근히 빠져들게 합니다.

맵고 달고 짠 입맛에 길들여진 요즘 세대엔 얼핏 맹숭맹숭 무슨 맛인가 할 수 있지만, 무언가 웅숭깊은 맛을 느낄 수 있습니다. 특히 만이창면이라 부르는 국수는 느릅나무 가루와 참깨 육수가 들어가 진한 맛이 일품입니다. 담백하고 깔끔한 건강식입니다. 고려시대 귀족들의 별미로 먹었다고 합니다. 고춧가루가 범벅인 요즘 음식과는 확연히 달라 보입니다. 세월 따라 음식문화가 바뀌듯 인간성도 함께 바뀌어 가는 걸 느낍니다. 그 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의 심성이 녹아 있습니다. 식문화가 곧 민족성을 나타내는 듯합니다.

우리 민족은 기쁜 일, 슬픈 일을 함께 나눌 때 늘 음식이 같이 했습니다. 음식을 나눈다는 건, 가슴 깊이에서 우러나는 마음, 그 정(情)의 표현입니다. 위로와 용기, 화해와 용서를 나타내는 은근한 몸짓입니다. 한국인에게 밥은 그냥 밥이 아닙니다. 5천 년 역사를 지켜온 무던한 심상입니다

밥 한 그릇에는 하늘과 땅과 사람을 담고 있다 했습니다. 밥상은 그 시대 역사와 문화를 담고 있다 했습니다. 음식을 통해서 우리가 살아온 이야기를 만날 수 있습니다. 삶은 곧 밥의 역사이고, 밥은 진솔한 사람살이의 역사입니다.

어느 작가는 말했습니다. "밥은 엄마다. 엄마는 탯줄 끝에 붙어 있는 밥이었다. 누대에 걸친 아슴아슴한 탯줄의 기억, 입안 깊숙이 숟가락 바통 물려주는 뜨끈한 계보다"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네 어머니는 집 떠나 있는 자식을 위해 늘 따뜻한 아랫목 이불 속에 밥 한 주발을 묻어두었습니다. 배곯지 말라고, 아랫배 불뚝 내밀고 뱃심 있게 당당히 살라고. 매일 무언의 기도를 아랫목에 묻고 또 묻었습니다.  밥은 어머니의 지고지순한 사랑입니다. 

집 나가 있는 아들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밥은?" 습관처럼 밥걱정이 먼저 튀어나옵니다. 어디 자식뿐입니까. 만나는 사람마다 흔히 하는 말이 "식사했나?"입니다. 예전에야 굶는 일이 허다했기 때문에 그것이 안부였지만 먹을 것이 넘치는 요즈음에도 여전히 밥 인사는 지속되고 있습니다. 밥은 단순히 목숨을 연명하기 위한 차원을 넘어 삶의 원천이요 화합의 문이며, 치열한 생존본능인 까닭입니다. 그 중심에 어머니가 있습니다.

오늘, 지극하고 따뜻한 정성이 깃든 진짓상에서 건강하고 여유로운, 무한히 평화롭고 아늑한 어머니를 만났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사랑 가득한 한해 엮어가길 염원하는 마음 하나 밥상 위에 더 얹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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