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시평] 김윤희 수필가·전 진천군의원

이 꽃이 무슨 꽃이냐/ 희어스름한 머리 白頭山의 얼이요/ 불그스름한 고운 아침 朝鮮의 빛이로다.//

단재의 소설 ‘꿈하늘’에서 우리나라 무궁화꽃을 읊은 시의 일부이다. 나라의 얼과 역사의식을 강조하며 평생을 독립운동에 몸 바친 사람이 있다. 단재 신채호 선생이다. 그는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했다.

우리 민족은 일본에 나라를 빼앗기고 수많은 사람이, 오랜 기간 독립을 위해 투쟁했다. 1919년 3.1 만세운동은 우리가 영원히 기억하고 그 정신을 절대 잊어서는 아니 될 정신적 유산이다. 독립운동가뿐만 아니라 온 국민이 하나 되어 자주독립을 외쳤다. 반・상이 따로 없었다. 가장 천대받았던 백정도 인간 이하로 여기던 자신의 나라를 위해 독립운동을 하였고, 지식인은 지식인대로 나라 찾는 일에 몸을 던졌다. 기녀, 학생 등 수많은 사람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올해로 3.1운동 104주년이 된다. 100여 년 세월을 걷는 동안 우리는 독립을 했고, 세계인이 주목할 만큼 급성장했다. 굶주리면서 허리띠 졸라매고 나라를 반듯하게 일구어냈다. 차디찬 감옥에서도 올곧은 정신을 지켜 오늘에 이르렀다. 배부르고 등이 따습다. 그러는 동안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할 부분을 잊어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일본의 침략이 우리가 잘못한 탓이라 한다. 아파트에 일장기가 걸렸다는 뉴스가 떴다. 어인 일인가. 목숨을 걸고 나라를 찾으려 했던 수많은 사람, 나라를 지키려 작은 힘을 보태며 스러져간 민초들이 이 일을 보았으면 무덤에서 벌떡 일어설 일이 아닌가. 물론 언제까지나 과거에 묶여 있을 수는 없다. 과거의 아픔을 딛고 앞으로 나아가야 함에도 공감한다. 그러나 남의 나라를 빼앗은 도적에게는 책임을 묻고 단호해야 한다.

지금도 일본은 독도를 우리 영토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호시탐탐 자기네 영토화하려는 야심이 엿보인다. 우리 민족이 피 흘린 수난의 역사를 결코 잊어서는 안된다. 다부지게 힘을 키워 더 이상 우리를 함부로 보지 못하게 하는 길만이 우리 아픈 역사의 상흔을 치유하는 길이다.

단재 선생이 주장했던 역사의식을 생각해 본다. 단재는 1880년에 충남 대덕 에서 태어나 일곱 살 때 청주 고두미 마을로 이주했다. 6세 때부터 한학을 공부하며 10세 때 행시를 지었고, 12세~13세 때 사서삼경을 독파한 신동이다. 그 후 신‧구학문을 접하면서 봉건유교의 틀을 깨고 민족주의적 세계관을 갖게 된다.

그의 수많은 업적 중 몇 가지만 꼽아 보면, 언론인이면서 사학자요, 문인이다. 역사서만 저술한 것이 아니다. 민족사상과 철학이 녹아 있는 역사소설, 시, 평론가로도 손색이 없는 작가다. 충북의 근현대 작고문인 15인을 소개한 ‘진천문학관’에 당당히 자리하고 있는 것도 그 이유이다. ‘독립신문’ ‘매일신문’ ‘황성신문’등을 통해 독립사상 고취는 물론 중국으로 망명하여 직접적인 독립운동에 참여하면서 역사서 저술에 혼신을 다한 인물이다. 1936년 2월 뤼순 감옥에서 순국할 때까지 나라와 민족과 호흡을 함께했다.

일제에 굽힐 수 없다 하여 세수도 꼿꼿하게 서서 하다가 앞자락을 다 적시곤 했다는 일화가 전해온다. 그의 부인 박자혜 여사 또한 여성독립운동가로 손꼽힌다. 그녀는 조선시대 아기나인으로 입궁하여 1911년 출궁한 뒤 신교육을 받는다. ‘간우회’를 조직하여 독립운동에 뛰어들어 활동하다 망명하여 신채호 선생을 만나 독립운동의 공동체가 된다. 고두미 마을에 가면, 현장에 녹아 있는 정신을 느낄 수 있다. 독립만세를 외쳤던 3월의 바람이 잊었던 의식을 깨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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