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칼럼] 한옥자 수필가

어린 날의 빛바랜 추억 중에 선명하게 생각나는 기억이 있다. 이르게 저녁밥을 먹고 집 근처에 있는 싸전에 도착하면 해가 질 무렵이었다. 싸전은 낮에는 쌀을 팔고 사는 사람으로 북적였지만, 밤이면 판이 바뀌었다.

어른들 틈에 끼어 가마때기 좌석을 차지하고 무대를 바라보면 노래, 만담, 춤이 이어졌다. 약장수가 흥을 한껏 올릴 무렵, 마당은 앉을 자리가 없을 정도로 꽉 찼다.

약장수 패들은 하나라도 더 팔려고 온갖 수단을 부렸다. 사람의 마음을 훔치는 만큼 매출도 올리므로 누구라도 관심을 보이면 착 달라붙어 혼을 뺏다시피 했다.

그때 팔던 약을 어른들은 만병통치약이라고 불렀다. 아파도 병원 한 번 가지 못하고 죽음을 맞아야 하던 시대였으니, 약 장수의 약은 구원 같은 존재였을 것이다. 집안에 오래도록 중풍을 앓는 사람, 병명도 모른 채 시름시름 아픈 사람, 어린 날 댓돌 위로 떨어져 척추를 다쳐 곱사등이 된 사람뿐만 아니라 백약이 무효인 병도 나을 거라는 믿음이 깊던 약이었다.

싸전 마당에 자주 드나들수록 약을 살 확률이 높았다. 같은 말을 반복해서 듣다 보면 세뇌가 되게 마련이고 그들의 갖은 입발림에 홀리지 않을 수가 없어서였다. 오죽하면 어린 나마저 집에 돌아와 한 번도 싸전 마당에 가지 않는 어머니를 졸라 약을 사자고 했을까.

웬만한 상처쯤은 된장을 발라 다스리고 소화가 안 되면 몇 끼니 굶어 견디던 시절이었다. 건강을 지켜줄 거라는 믿음 하나로 속곳 깊은 곳에 숨긴 쌈짓돈을 헐어서라도, 약을 사고 싶었던 마음. 그건 약을 사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훔치고 빼기는 일이었다.

한 번 판을 펼치면 두어 달쯤은 족히 자리를 지키던 약장수들은 얼마나 많은 금전적 이익을 얻었을까. 그들이 다녀간 후, 약효가 있었다는 속 시원한 말은 들은 바가 없다. 다만, 정신적 위안은 됐을 것이다. 약 성분도 모르고 환을 지으려면 꼭 필요한 찹쌀가루만이 오늘날까지 유일하게 검증된 재료이다.

지금도 노인이 많이 모이는 재래시장 근처에는 의료용 체험관이 모여 있다. 그곳은 환심을 사려는 언어가 난무한다. 외로운 노인의 마음을 훔칠 곳으로 그만한 장소도 없다.

오래전 싸전 마당에서나 팔던 만병통치약이 최근 서민 대책으로 돌아왔다. 난방비와 전기료가 올랐으니 에너지를 아끼란다. 2003년부터 OECD 국가 중 자살률 1위인 우리나라의 보건복지부는 자살 방지 대책의 하나로 산화형 착화제가 사용된 번개탄 생산을 금지하겠다고 한다.

또한, 쌀값 폭락을 방지하기 위해 '신동진벼'를 비롯해 수확이 잘 되는 품종을 퇴출하겠다고 하며 한우 가격 하락에 대응해 내년 상반기까지 암소 14만 마리를 감축한다고 발표했다. 연 소득 3,500만 원 이하의 신용 하위 20%인 차주에게 긴급생계비로 최대 100만 원 한도로 대출해 주고 15.9%의 이자를 받겠다니 정부가 고리대금업에 나섰냐고 논란마저 일었다. 모두 60년대 싸전 마당의 약장수가 팔던 약보다 오리무중의 만병통치약 같다.

긴 겨울이 가고 봄이 왔다. 매화가 벙글고 향기 따라 날아온 벌이 분주하다. 봄날 같은 서민 대책은 없는 것일까.

저작권자 © 충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