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목련] 육정숙 수필가

지난겨울은 유난히도 추웠다.

기상위기, 코로나19의 늪, 핵전쟁의 위협, 경제위기 등등 전 세계가 위협과 위기에 봉착되었다. 그러나 자연의 시간은 시나브로 햇살이 온화해졌다. 어느새 봄인가보다.

봄은 환희요 기쁨이다. 봄날의 은혜로운 빛은 언 땅을 녹여서 대지의 젖줄로 흐르게 하니 겨울이 아무리 매섭게 춥다 한들 봄은 온 대지를 푸르고 화사한 꽃으로 가득 채울 것이다.

지구의 운행 궤도를 돌고 돌아 우리 곁을 찾아오는 봄 햇살에 언 땅이 녹아내리듯, 국가와 국가사이, 사람과 사람사이, 서로에 대한 춥고 어둡고 침울한 적대감들이 흔적 없이 녹아내리기를 기원해본다.

그러나 무언가에 체한 듯 속내가 답답하여 봄바람이 불어오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제부도 가는 길, 서해랑 해상케이블 카에 올라탔다. 설레는 마음에 소녀가 되어간다.

서해랑은 섬, 언덕, 작은 섬 서(嶼) 바다 해(海) 물결 랑(浪)을 표현 한 것이다. 각 단어별로 부여되는 의미를 통해 물결치는 바다의 언덕과 작은 섬이라는 직접적인 의미와 전곡항으로부터 신비한 섬 제부도까지 아름다운 노을이 물결치는 바다를 잇는 새로운 바닷길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한다.

케이블카 크리스털 발밑으로 서해의 푸른 바닷물이 출렁인다. 간이 움찔했다. 높게 떠서 바라보는 서해는 마치 푸른 비단을 펼쳐 놓은 것 같다. 코발트 빛 봄 바다엔 하얀 종이를 동그랗게 만들어 띄운 듯 갈매기가 살랑거린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수면 밑으로 갈매기의 물갈퀴는 쉼 없이 물길을 가르고 있었다. 더러는 힘찬 자맥질로 푸른바다를 차며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날아오르기 위해 흰 날개로 털어내는 물빛은 찬란했다. 소화불량을 풀어내는데 이만한 풍경이 있으랴.

하루에 두 번 열리는 물길이다. 다행히 물때가 맞아 모세의 기적, 바닷길이 열리고 자동차들이 줄지어 오간다. 대지의 혈관을 따라 봄이 흐르니 바닷물도 흐른다. 나도 따라 흐른다. 모두가 막힘없이 흐르기를 하늘 가까이 있음에 더욱 간절한 마음이다.

걸치고 있던 푸른 비단자락을 스르륵 벗어 내린 서해는 요염했다. 속살이 촉촉하다. 그 위로 크고 작은 숨구멍들이 수없이 나있다. 그들은 생명을 품고 있다. 그 사이사이로 인간의 혈관을 똑 닮은 굵고 가는 물길들이 구불구불 수없이 흐른다. 언 땅에서 녹아 나오는 것들이 흐르고 또 다시 흘러 어머니의 푸른 자궁 속으로 흘러든다. 바닷물이 빠지고 속살을 드러내니 또 다른 세상을 보는 것 같다. 예전엔 물 때 시간을 확인하고 자동차로만 다녔던 길. 이제는 새로운 바닷길, 하늘 길에서 신비한 풍경을 즐기고 있다.

누군가는 떠나고 누군가는 머무르게 될, 끝과 시작이 공유하는 곳. 하늘과 바다가 하나가 되는 해안 산책로 데크 로드에서 자연이 전해주는 위로를 한 장의 사진에 담는다. 먼 훗날, 잠시 머문 시간의 노정이 그리움 속에 애틋하게 다가오리라.

아직은 겨울바람이 남아 하얗게 숨을 뿜어낸다. 우리는 언제나 과거의 시간에서 부터 또 다시 시작 한다. 날마다 해가 뜨고 지는 일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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