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시평] 김윤희 수필가·전 진천군의원

3월의 마지막 날이다. 꽃들이 일제히 입을 열었다. 삽시간에 함성으로 이어진다. 길가 언덕배기에 민들레, 꽃다지, 제비꽃이 발치에서 꼬물꼬물 일어선다 했더니 어느새 개나리 수다가 노랗다. 살구꽃, 목련꽃은 물론, 산등성에 진달래가 꽃물을 쏟아낸다. 꽃피는 시기가 따로 없다. 환경, 실정에 따라 제가 알아서 향기를 터트린다. 한 달 사이 전국이 들썩인다.

1919년 그때도 그랬으리라. 3월 1일 탑골 공원에서 시작된 대한독립만세 운동이 전국으로 번져나갔다. 어린 여학생에서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함께 일어섰다. 남녀가 따로 없었다. 지식인들에서부터 일반 민초에 이르기까지 온 국민이 한마음이었다. 들불처럼 삽시간에 타오른 불길이 우리 지역에 와서 활활, 점화된 것은 4월이 시작되면서 부터다.

그 선봉에 중암 윤병한이 있다. 중암은 충북 진천군 광혜원 사람이다. 대한제국 육군참위 출신으로 조국을 지키는 군인이었다. 1907년, 일본의 부당성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 고종은 만국평화회의가 열리는 헤이그에 이상설 등 특사를 파견했다. 이를 빌미로 일본은 고종황제 퇴위와 우리 군대를 강제로 해산시켰다. 이후 중암은 의병에 투신하여 일제 항쟁의 길로 들어선다. 1873년에 태어나서 1932년 순국할 때까지의 그의 일생은 3월을 불사른 봄꽃과 같았다. 봄, 조국 광복의 횃불이었다.

고향으로 내려온 그는 의병과 계몽운동을 하면서, 면 유림을 대여하여 조림사업을 한다. 서산계를 조직하여 계장을 맡아 활동할 때다. 4월 2일, 때마침 광혜원 회죽리 일대의 면 유림에 식목하는 날이다. 나무를 심기 위해 자연스럽게 많은 사람이 모이게 되니 거사하기에 안성맞춤인 날이었다.

중암이 태극기를 흔들며 선봉에 서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자, 200여 명의 군중이 합세하여 면사무소와, 건설 중인 헌병주재로 진격하며 격렬한 만세 시위 활동을 전개했다. 불붙은 만세 열기는 4월 3일 광혜원 장날로 이어진다. 일본의 총포에도 불구하고 장터를 행진하며 2,000여 명이 외친 조국 독립의 함성은 지축을 울렸다.

일본 헌병의 무차별 발포로 박도철 등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지만, 민초들의 목숨을 건 항쟁은 일본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진천, 백곡 등 곳곳으로 번져 타오르는 항일의 바람은 걷잡을 수 없었다. 윤병한은 주동자로 체포되어 징역 3년 형의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을 기려 1980년 대통령 표창을,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렇게 목숨을 걸고 온 국민이 되찾은 나라, 광복한 지 올해로 78년이 된다. 그동안 일본은 변한 것이 없다. 침략 근성은 그들의 본성인가. 시나브로 우리만 변했나 보다. 항일의식은 퇴색하고, 그들에게 빼앗긴 35년의 세월을 잊었다. 언제까지나 원수처럼 지낼 순 없다 해도 이제 더 이상 굴욕적여서는 안 된다. 실리를 차려야 한다. 우리가 양보하고 한발 물러선다고 그들이 옛날 과오를 인정하고 호락호락 양보할 위인들이던가.

수많은 역사 왜곡은 말할 것도 없고, 독도 문제 역시 마찬가지다. 옛 지도 등 각종 문헌에 한국 것으로 명시된 사실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한일 외교에서 우리가 내민 손길을 비웃기라도 하듯 외려 그들이 행한 전범 행위를 더 정당화하려 하지 않는가. 일본 교과서, 요즈음 뉴스를 보면 열이 오른다.

언 땅 헤집고 일어선 풀꽃, 들불처럼 번져가는 봄꽃들의 함성이 우리의 의식을 깨운다. 한 달이 넘게 지속하던 만세운동, 그 항쟁에 산화된 넋이 눈물 꽃으로 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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