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논단] 황종환 중국 칭화대학 SCE 한국캠퍼스 교수·한국자산관리방송 논설실장

지난 주말 불현듯 집 가까이에 있는 나지막한 산을 찾아 산책하였다. 등산한다거나 걷고 싶다는 생각보다는 꽃봉오리가 움트는 자연의 신비를 마냥 느끼고 싶어서였다. 얼마 전 양재천변을 걸어갈 때 보았던 개나리 꽃봉오리가 산책로 주변에 노랗게 활짝 피어있다.

무념무상으로 산중턱에 올라가니 진달래가 진한 분홍색 꽃망울을 터뜨릴 채비를 하고 있다. 한겨울 추위를 이겨내고 우렁찬 생명의 고동소리를 울리는 듯하다. 산에서 내려와 냇가에 들어서니 수양버들이 수염처럼 길게 새잎을 늘어뜨린 채 연록의 향연을 베풀어준다. 연초록 잎사귀가 눈부시게 신선한 아름다움을 발산하고 있다. 봄의 새잎을 바라보는 순간 눈이 맑아지고 마음이 정결해지는 기분이다. 벌써 양재천의 봄날이 마음속에 깊숙하게 들어왔다.

아침 일찍 서재 창문을 여는 순간 완연한 봄이 시나브로 다가왔음을 실감하게 된다. 방안으로 뉘엿뉘엿 스며드는 아침 햇살이 겨울 내내 축적된 상처를 어루만지며 아픈 마음을 위로해준다. 봄의 기운을 가장 먼저 알아차리는 것은 작고 여린 풀잎이다. 매서운 추위를 견뎌내고 사무치는 기다림을 애타게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양재천이나 공원에 인파가 북적거려 조금은 불편하기는 하지만 코로나19 사태로 움츠러졌던 몸과 마음을 풀어줄 수 있어 그나마 다행이다. 집 밖으로 나와 따사로운 햇살을 받으며 기지개를 활짝 켜고 봄의 꽃들을 맘껏 즐기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기 좋다.

얼마 전 직장 선배와 점심 식사자리에서 우연히 만난 연세가 지긋하신 목사님께서 들려주신 말씀이 떠오른다. 남이 자신의 잘못이나 실수를 지적하면 먼저 인정하고 사과할 줄 알아야 인생을 즐기면서 살아갈 수 있다고 강조하셨다. 대체로 나이가 들어가면서 고집이 강해지고 남의 말을 듣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잘못이나 실수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많다고 한다. 지나간 세월을 뒤돌아보면 잘못이나 실수를 인정하고 사과하는 일이 많이 부족했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된다. 먼저 인정하고 반성하는 여유로운 마음이 한층 삶을 편안하게 하는 것은 분명하다.

윤동주 시인의 참회록은 반성과 성찰의 상징인 거울을 통해 끊임없이 변화하려는 인간의 내면을 정직하게 보여준다. 파란 녹이 낀 구리거울을 밤이면 밤마다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보자는 심정으로 내면의 부끄러움을 반성하고 성찰한다. 도대체 만 24세를 갓 넘긴 젊은이가 밤마다 참회할 일이 그리 많았을까 궁금해진다. 나라를 잃어버렸거나 빼앗겼던 어둠의 시대를 살다간 선조들 중에 이렇게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맑고 깨끗한 분이 많다. 전혀 잘못이 없을 것 같은 분들이 겪었던 고초와 번민을 생각하면 가슴이 저려온다. 흘러간 역사의 아픔조차 부끄러워하며 자신의 잘못으로 인정하며 반성하고 성찰하는 것은 내면에 양심의 거울이 있어 가능한 일이다.

요즘 가끔 아내로부터 습관적인 행동에서 비롯되는 사소한 잘못이나 실수를 지적받는 경우가 있다. 과거에는 나름 이해할 수 있었던 말이나 행동이 현재 상황에서 보면 세태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다는 이유일 것이다. 무의식적으로 나타나는 과거의 습관적인 언행이 혹시라도 남에게 불편을 끼치지 않을까 걱정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적을 당하면 갑자기 목소리가 커지고 표정이 바뀌면서 순간 분위기가 싸늘해지는 경우가 있다. 한참 시간이 지나 생각해보면 실수를 인정하고 사과하기보다 불가피한 상황을 설명하며 은연중 변명이나 핑계를 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사실 가족이나 가까운 지인의 진심어린 지적이나 충고를 받아들이고 인정하고 반성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요즘 정치 경제 사회 전반에 걸쳐 발생하는 사건이나 문제들로 인해 많은 일반 국민들은 매우 피곤하고 불편한 기분을 느낀다. 특히 정치인과 사회지도층이라는 자처하는 이들은 잘못이나 실수를 인정하고 사과하기보다 상대방이 문제라고 치부하며 변명과 핑계로 일관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특히 화나게 하는 것은 무능함보다 몰염치와 우격다짐으로 행동하는 내로남불 태도라고 할 수 있다. 내면을 비춰보는 거울이 없거나 비추었더라도 자신의 이익을 위해 애써 머리를 돌려 외면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이러한 자세로는 근본적으로 문제를 해결하거나 발전을 도모할 수 없다.

진정성 있는 삶을 추구하는 사람에게는 내면의 거울은 아주 중요한 자기 성찰의 도구가 된다. 자신을 비춰주는 거울이 없다는 것은 내면의 양심이 없다는 말과 다름이 아니다. 잘못이나 실수 자체가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제대로 인정하고 사과하며 반성과 성찰을 하지 않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다. 스스로 자신의 말과 행동을 뒤돌아보면서 인정하고 반성하는 것은 당연하다. 삶을 즐기면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남의 지적이나 충고를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여유로운 마음 자세가 바람직하다.

이제 봄의 햇살이 너무 눈부시다. 지천에 널려있는 개나리꽃 벚꽃 진달래꽃이 오색찬란한 모습을 드러내고 활짝 웃고 있다. 지금까지 고단했던 자신을 잃어버리고 봄꽃이 피는 나무가 되는 상상을 한다. 고난을 모르는 사람보다 더 불행한 사람은 없다. 고난은 성공으로 인도하는 채찍이며 행복의 전주곡이다. 고난을 이겨내고 본래 모습으로 다시 피어나는 꽃들을 바라보는 순간 자연의 섭리 앞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지금이 꽃 피는 봄날이다. 스스로 신분의 변화를 자각하고 자연의 질서에 순응하며 인간 본성을 찾을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하는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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