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광장] 유인순 한국커리어잡스 대표이사

작년부터 무궁화를 심어서 꽃피우고 싶다는 생각을 키워왔다. 그 생각은 턱없이 부족한 돈으로 밭을 장만하게 했고, 이자율이 올라가는 판에 대출 받아가며, 무모하게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칠순이 가까운 나이에, 있는 부동산도 정리해야 하는 판에, 빚까지 얻어가며 땅을 사겠다는 계획에 주변 사람들 모두가 말렸다. 그러나 무궁화를 심을 수 있다면, 집을 줄여도 좋고, 아예 집을 팔아서 밭 한쪽에 여섯 평 농막을 짓고 살아도 좋다고 생각했다.

유관순 열사에 관한 연구를 하기 위해 근대사를 공부하던 중 무궁화에 관한 방송을 보게 되었다. 독립운동가들은 ‘싸우자 철벽같은 광복군아, 대한 남아가 무궁화 되어 아름답게 만발할 날 돌아왔도다. 무궁화 만발했네’ 라는 노래를 부르며 항거했다고 한다.

군가 속의 무궁화는 대부분 조국을 상징하며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드러냈고, 수많은 외침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피고 지는 국혼을 상징하기도 했다. 그로 인해 일제는 조선의 무궁화를 모두 없애버리려는 무궁화 말살 정책을 폈고, 무궁화를 키워 보존하려는 남궁억을 체포하여 죽였다. 학생들에게 마당에 있는 무궁화를 뽑아오게 했고, ‘눈에 피꽃’ ‘부스럼 꽃’ 등으로 가르치는 등 세계사에 유례가 없는 ‘식물 탄압’ 정책을 펴기도 했다. 온갖 박해로 인해 무궁화는 울타리 안에서 몰래 키우는 애절한 꽃이 되었고, 천덕꾸러기 국화로 전락했다.

길가 키 큰 나무 밑에 촘촘히 서 있는 무궁화는 말 그대로 진딧물이 있었고, 꽃도 화려하게 피지 않았다. 그렇게 민족의 꽃인 무궁화는 사랑받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방동리 무궁화’를 영상으로 보는 순간, 봄이면 모든 이의 관심을 끄는 오래된 수령의 벚꽃에 비할 바 없이 아름다운 자태에 깜짝 놀랐다. 백 년을 견딘 천연기념물답게 수천 송이 무궁화 꽃이 매일 새롭게 피어나는 경이로움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마음을 모두 빼앗겼다. 그런 꽃을 피우고 싶다는 강렬한 열망이 솟구쳤다.

벚꽃 대신 이제는 무궁화다. 일반적인 무궁화는 수명이 사십여 년이라고 하는데, 잘 가꾼 무궁화는 백 년을 더 사는 것이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나라꽃 무궁화를 심어 가꾸는 일을 시작하고 싶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무궁화를 사랑하고, 그 결과 헌법에서도 인정하는 우리의 국화로 만들고 싶었다.

무궁화 관련 개인 영상을 계속 찾아보니 천안 성환에 ‘무궁화 마을’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남궁억의 고향 홍천에도 무궁화가 가로수가 있지만 급한 마음에 성환에 먼저 갔다. 동네 길가에 심어진 무궁화를 보고 와서, 이장님을 수소문했고 연결이 되어서 사연을 말씀 드렸더니 흔쾌히 묘목을 나누어 주시겠다고 했다. 마을 길 무궁화도 이장님이 자신의 농장에서 묘목을 길러내어 식재하고, 해마다 전지하며 관리한다고 했다. 무궁화에 진심인 것을 아셨는지 물에 담가 놓았던 묘목 세 다발에, 4년 이상 자란 무궁화 나무 100여 주를 더 주셨다. 사례하겠다고 했지만, 지금껏 무궁화를 돈 받고 팔아 본 적이 없다며 잘 키우라는 격려의 말을 해 주셨다.

온종일 구덩이를 파고 나무를 심었다. 뿌리가 실해서 구덩이를 크게 파야 하기에 삽질하는 게 힘들었지만, 그토록 바라던 무궁화를 심다 보니 고통도 잊었다. 무궁화를 위해 산 땅이니 무궁화에 넉넉하게 내어 주었다. 나무 사이에 바람이 휘돌아 진딧물이 생기지 않게 널찍널찍 자리를 잡았다. 며칠 후 비가 흠뻑 내렸다. 그 비로 산불이 꺼진 것이 무엇보다 다행이지만 나무를 심고 나니, 하늘 표정을 자주 살핀다. 비를 기다리는 마음이 되었다.

마른 나뭇가지에서 작은 순이 솟았다. 아이를 낳아 키우듯, 무궁화 밭에서 그것들을 살뜰하게 보살피리라. 주말이면 밭에 나가 뾰족하게 솟아나는 그것들을 쓰다듬는다. 내년에는 필자도 대홍리 이장님이 하신 것처럼 무궁화를 누구에겐가 나누어 줄 수 있을 것이다. 가슴 속에는 벌써 ‘방동리 무궁화’가 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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