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종환 중국 칭화대학 SCE 한국캠퍼스 교수·한국자산관리방송 논설실장

봄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뒤편 경희궁 주변을 둘러볼 기회를 가졌다. 10년 만에 우연히 결혼식장에서 만나 식사하기로 했던 후배 사무실이 근처에 있어서다. 점심 식사 후 깨끗하게 잘 정비된 아파트단지와 오피스 건물이 기존 주택가와 잘 어우러지는 골목길을 따라 산책하였다. 주변 길가와 담장 너머 피어있는 영산홍, 복사꽃, 살구꽃, 꽃잔디, 튤립, 라일락, 조팝나무꽃 등 형형색색 꽃들이 환상적인 아름다움을 뿜어낸다. 과거와 현재가 멋진 조화를 이루며 그려내는 기품 있는 모습이 편안해서 보기가 좋다. 고즈넉한 정취를 발산하는 낭만적 도심의 풍경에 빠져드는 순간 한층 삶이 단단하게 채워지는 기분이다.

봄비가 내린 후 화창한 날에 서부전선에 있는 DMZ를 견학하는 행사에 며칠 전 다녀왔다. 날씨가 맑고 깨끗하여 북쪽 비무장지대를 한참 지나 멀리까지 선명하게 가까이 보인다. 작은 나무들과 잡초가 초록빛으로 초원을 물들이고 들꽃들이 광활한 평원을 화려하게 수놓는다. 세상 어느 곳과도 비교할 수 없는 천혜의 풍광이다. 하지만 세계 역사상 유례없는 민족상잔의 비극으로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이 희생되었다는 안타까운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부근에 있는 유엔군 화장터를 찾아서 참배하며 이역만리 타국에서 일어난 전쟁에 참전한 장병들이 소중한 목숨을 잃었다는 슬픔에 한편으로 마음이 숙연해진다.

3년 전 봄이 시작될 쯤 전 세계적으로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창궐하였다. 예상치 못한 세계적인 혼란 상황이라서 계절이 바뀌는 것도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했다. 눈앞에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쌓이다보니 날씨와 시간의 흐름에 반응하기보다는 고통의 순간이 빨리 지나가기만을 바라던 세월이었다. 자명한 사실이지만 지금까지는 누구에게나 죽음을 말한다는 것은 아주 불편하고 어려운 일이었다. 상상하지 못한 질병과 아픔으로 갑자기 사랑하는 가족을 작별인사도 하지 못하고 떠나보낸 사연을 매 순간 접하면서 어느덧 죽음과 가까워졌다. 자연스레 삶의 일부로 죽음을 받아들이고 준비하는 분위기가 마련되었다. 이제 다소 상황이 진정되고 다시 계절의 변화를 알아차릴 여유를 찾았으니 그나마 감사할 일이다.

오랫동안 모임을 가졌던 선후배 삼십여 명이 3년 만에 모처럼 점심식사 자리를 가졌다. 하염없이 세월의 변화에 기대어 상황이 점차 나아지기를 기다렸으나 바라는 만큼 나아지지 않아 결국 만나지도 못했다. 그 기간 동안 다섯 분이나 세상을 떠나셨으니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그리스 비극 시인 에우리피데스는 ‘죽음은 인간이 반드시 갚아야 할 빚이다’라고 하였다.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는 슬픔이 더욱 아프게 다가오는 것은 어찌할 수 없다. 우주적 관점에서 보면 존재하는 것들은 소멸을 거쳐 빚을 갚고 떠난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죽음은 예고 없이 다가오고, 누구에게나 끝은 찾아온다.

최근 급격한 세상의 변화에 적응하기가 쉽지 않아 많은 사람들이 삶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방황하는 경향이 있다. 그만큼 변화된 세태에 적응하지 못하여 평온하지 못하다는 뜻이다. 최근 직장 상사의 갑질에 힘들어하다 세상을 등진 아파트 경비원, 지방에서 올라온 후 학업성적 부담으로 투신한 중학생, 유력 정치인과 관련된 사건에 연루되어 고민하다 떠난 사람 등 인명사고가 주변에서 가끔 들려온다. 각각의 사연으로 소중한 목숨을 내던지는 충격적인 사건을 접하면서 한편으로 혼란스럽고 가슴이 먹먹하다. 과연 어떤 문제들이 스스로 소중한 생명을 내던질 만큼 힘들게 하였을까 궁금하다.

옛날 전쟁터에서 어느 장군은 격렬한 전투가 잠시 멈추자 숙소에서 따뜻한 차 한 잔을 마시기 위해 소중히 보관하던 찻잔을 꺼내 차를 따랐다. 차를 마시다가 손에서 찻잔을 놓칠 뻔한 순간 다급히 다른 손으로 찻잔을 붙잡아 깨지지 않았지만 찻잔을 깨뜨리는 줄 알고 가슴이 철렁하였다. 순간 장군은 전쟁터에서 아끼던 병사들이 눈앞에서 쓰러져 갔을 때도 적군에 포위되어 목숨이 풍전등화 같던 때도 그처럼 가슴이 철렁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병사들의 목숨보다 작은 찻잔에 집착하는 자신을 깊이 반성하고 찻잔을 그 자리에서 바로 깨뜨려버렸다. 순간의 행복과 쾌락보다 소중한 것을 가볍게 여기지는 않는지 돌아보게 하는 이야기다.

존스 홉킨스 의대를 설립한 윌리엄 오슬러 경은 의사 자격시험도 제대로 치를 수 없을 정도로 걱정과 두려움이 많던 아주 평범한 청년이었다. 그는 토머스 칼라일의 “멀리 희미하게 보이는 것을 보려 하지 말고, 눈앞에 분명히 놓여 있는 것을 행해야 한다.”는 문장을 가슴에 새기면서 변하였다고 한다. 주기도문은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로 전달된다. 지금 먹을 수 있는 빵은 오직 오늘의 빵이다. 내일은 아직 시작되지 않았고, 오늘은 지나간 과거가 아니다. 생각과 걱정은 분명히 다르다. 생각은 인과관계를 따져 내일을 구체적으로 계획하는 것이지만, 걱정은 흔들의자 같아 앞뒤로 계속 움직일 뿐 나아갈 수 없다. 할 수 없는 일을 걱정하지 말고 당장 오늘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편이 훨씬 낫다.

따사로운 봄볕 아래 땀을 흘리며 밭에 파를 심는 농부의 모습을 보았다. 평소 생각했던 것보다 땅 속 깊이 심지 않고 흙으로 살짝 덮어준다. 지나치다 궁금하여 여쭤보니 적당히 흙으로 덮어줘야 비바람을 맞으면서 뿌리가 튼튼하게 내려 굵은 대파로 쑥쑥 자란다고 한다. 적당한 온도와 습도 속에서 자라난 화초는 약하다. 햇볕이 뜨거우면 양산이 되고, 비가 내리면 우산이 되고 싶은 애틋한 마음도 받아들이는 사람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필요한 것으로 뿌리내리기 십상이다. 사랑이 넘치면 다정도 병이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마음도 이와 같다. 폭풍우가 내린 후 땡볕 더위가 나쁜 것만은 아니다. 뜨거운 여름을 견딘 포도가 맛이 있다.

때로는 잘못 들어선 길이 새로운 지도를 만든다. 두려움을 극복하는 것은 용기다. 불안한 상상을 하게 될 때 한 발자국 떨어져 바라보면 그다지 대단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제 다시 시작하는 계절이다. 꽃바람이 분다. 상큼하고 싱그러운 꽃바람에 분홍빛 보랏빛 꽃잎이 날리면 아련한 그리움이 피어난다. 누구에게나 이 세상에서 오늘 존재하는 이유가 반드시 있게 마련이다. 아무리 삶이 힘들고 고통스러울지라도 자신을 존중하며 소중하게 여기면서 살아가는 것이 바람직하다. 신록이 점점 드리워지는 꽃길을 걸어가며 지친 영혼이 영원한 소망으로 채워지기를 간절하게 기도하는 아침이다.

저작권자 © 충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