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시평] 김윤희 수필가·전 진천군의원

4월이다. 어느새 조팝나무엔 종알종알 수다가 하얗게 늘어졌다. 따비 밭 모롱이에 흐드러졌던 추억 한 다발이 가슴에 와 안긴다. 조팝꽃, 아니 싸리꽃이다. 그랬다. 내 어릴 적에 싸리꽃이라 불렀다. 가느 댕댕한 가지에 줄줄이 자디잔 꽃들을 피워올려 하얀 꽃방망이를 이루었다.

친구들이랑 산나물 뜯으러 산기슭을 오르면 싸리꽃이 먼저 손을 내밀었다. 같이 놀자는 거다. 겨우내 친구가 그리웠던 게다. 나물이 뭐 대수랴. 바구니 내동댕이치고 꽃 무더기에 싸여 우리들의 웃음도 까르르 꽃잎으로 흩날렸다. 아득한 옛이야기가 은은한 향기를 실어 자박자박 걸어온다.

아침나절, 두타산을 오르자는 문우의 전화가 생기를 부른다. 부랴부랴 옷을 챙겨 입고 집을 나섰다. 두타산 정상, 전망대까지는 자동차로 오를 수 있도록 길을 잘 닦아 놓았다. 산 아래에서부터 걸어 올라도 되고, 정상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바로 전망대를 올라 산 아래 펼쳐진 풍광을 조망할 수 있다.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초평호와 어우러진 산야가 장관이다. 특히 한반도의 지형을 품은 초평호 안의 꽃섬은 벚꽃이 피면 섬 전체가 하얀 꽃동산을 이룬다. 그래서 붙어진 이름이 ‘꽃섬’이다. 전망대에 올라 꽃섬을 내려다본다. 눈 시리게 빛나던 벚꽃은 이울고 있지만 무덕무덕 초록물을 품어내기 시작한 산빛이 싱그럽다. 중간중간 분홍꽃이 어우러진 연둣빛 산 색깔이 꽃보다 아름답다. 바람이 상쾌하다. 자연이 주는 맛이다.

해발 598미터 높이의 두타산은 진천군에서는 두 번째로 높은 산이다. 삼형제봉의 아기자기한 바위와 어우러진 진달래 군락지, 여기저기 서 있는 돌탑의 정겨움도 산세와 함께 빼놓을 수 없는 볼거리다. 돌탑을 쌓은 노인장에 의하면, 살아생전 두타산에 빠져 매일 오르내리며 돌탑을 쌓기 시작했다며 기가 서린, 영험한 산이라 했다.

두타산(頭陀山) 전설을 짚어보면, 진천의 역사, 두타산의 내력이 읽힌다. 단군 시절, 7년간 비가 내려 세상이 온통 물바다가 되었을 때다. 신하인 팽우가 배를 타고 사람들을 구하던 중 자그마한 섬이 보여 그곳에 배를 대고 수십 명을 피신시켰다. 그곳이 바로 두타산의 머리였다고 한다.

진천에서는 지방유형문화재 ‘농다리’와 더불어 ‘초평호’ ‘두타산’을 관광벨트로 가꾸어 가고 있다. 두타산은 전망대에서 즐기는 풍광도 일품이지만, 도보로 오르는 길가 역시 발걸음을 가붓하게 한다. 진입로 2㎞ 정도의 구간이 조팝나무로 군락을 이루었다. 은은한 향기를 맡으며 하얀 꽃길을 걷는 정취를 느낄 수 있다. 싸리꽃으로 더 많이 알려진 조팝꽃은 어릴 적 추억을 부르는 정겨운 친구다.

추억은 미소를 부르고, 사람의 마음을 정화시킨다. 흐드러진 조팝꽃은 보는 것만으로도 힐링이 되지만, 실제로 여러 효능이 있다고 전해진다. 아스피린 성분이 있어 몸에 열을 내리고, 통증 완화, 상처 치료, 관절염에 좋다고 한다.

세상을 다스려 나가는 데는 잘난 사람만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귀하게 자랐다 해서 존재가치가 큰 건 더더욱 아니다. 흔해 빠진 조팝꽃처럼 무리 지어 있지 않으면 눈에 잘 띄지는 않아도 가치로운 이가 얼마나 많은가.

4월, 세상을 하얗게 밝히는 꽃 무리, 그 효능만큼 내 삶의 여정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무엇인가. 고만고만한 사람끼리 무리 지어 정을 나눌 수 있는 삶을 살고 싶은 거다. 열 오르는 사람도 없고, 상처로 아파하는 사람도 없이 따뜻한 피가 훌훌 소통되는 사회, 조팝꽃 흐드러진 세상을 꿈꾸어 본다. 민초들이 활짝 웃는 사회가 진정 행복한 나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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