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목련] 육정숙 수필가

태블릿을 터치하는 어린 손주의 앙증맞은 손을 바라보며 어머니의 손을 보듬는다. 수분기 없는 어머니의 손은 갈잎처럼 버석거렸다. 사방이 창문 하나 없는 좁은 벽에 갇힌 듯,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는 현실을 자각하는 순간이다. 마음이 착잡하여 창문을 열었다.

봄 햇살이 함성을 지르니 결 고운 바람이 온 세상으로 초록 물을 들인다. 민들레 홀씨가 우아하게 봄 하늘을 날아오른다. 가장 낮은 곳에서 자라나 꽃으로 피어있던 인연 꼭꼭 말아 쥐고 민들레 홀씨 되어 떠나는 길, 훨훨 날아 어디로 가려는가.

산과 들, 보도블록 틈새, 높은 아파트 담벼락 아래 가장 낮은 곳에서 바닥을 따라 자라는 민들레. 어디가 되었든 제 머문 곳에서 뿌리를 깊게 내리고, 사오월에 흰색이나 노란색의 꽃을 피운다. 잔디나 잡풀을 깎을 때, 함께 잘려나가면 이듬해 봄에는 더 낮은 모습이 되어 꽃을 피운다고 한다. 씨앗은 흰색 깃털이 달려있어 바람이 불면 쉽게 날려간다.

이른 봄 어린잎은 나물로 먹고 식물 전체를 캐서 말린 것을 포공영이라 하여 한방에서는 소화를 돕는 약재로 쓰이며 또한 항암작용도 있다고 한다. 활짝 핀 민들레꽃을 보고 있으면 속된 기색 없이 맑고 고아하다. 민들레는 어떤 역경에서도 굴하지 않는 열정과 강인함, 자유로운 정신을 지녔다.

시간을 따라 바람과 햇살의 애무는 점점 관능적이다. 지난가을, 이별을 혹독하게 견뎌내느라 꼭 감고 있던 꽃눈은 바람의 애무에 맺힌 마음을 활짝 열어젖혔다. 잎눈은 햇살의 입맞춤에 한껏 무르익어 몸짓이 더욱 요염하다.

이렇게 봄은 화사하게 우리 곁으로 돌아오는데.

어깨를 짓누르는 현실의 무게를 잊고 싶어 봄 길을 따라간다. 엄마가 무쳐 준 봄나물 비빔밥이 생각난다고 두 돌 갓 지난 손주를 데리고 어미를 찾아온 아들 내외를 바라보며 기억 속에 멈춰 있는 어머니의 봄을 꺼내본다.

먼 남쪽에서 바람이 꽃소식을 전하면 정월 눈 녹은 물로 장을 담가야 맛있다며 바지런한 어머니의 봄날이 시작된다. 빛의 형상이 보석처럼 쏟아지는 날이면 추운 겨울을 견디고 언 땅을 뚫고 나오는 봄나물을 먹어야 건강에 좋다며 쑥버무리, 냉이무침, 달래냉이 된장찌개를 끓이신다. 다래나무에 새순이 오르면 몸소 채취해온 다래 순 나물로 봄의 맛을 알게 해 주시던 어머니. 제주도 유채꽃이 필 때면 종종 떠나시던 여행도 한철이었던가.

요양원 면회를 마칠 시간, ‘엄마 또 올게요.’ 딸의 눈 맞춤에도 어머니의 눈동자는 허공에 달처럼 떠있다. 영화 같았던 버라이어티한 생의 한가운데를 지나고 보니 돌아올 길을 하나, 하나 지워내고 계시는가.

발길이 떨어지질 않는다.

빛바랜 목련이 지고 나면 나무들은 푸르러지고, 지상으로 지는 해는 내일 또 다시 떠오르건만, 새로운 곳을 향해 떠나는 자유로운 영혼. 어머닌 너를 닮고 싶으셨는가. 봄 하늘로 날아오르던 민들레홀씨는 어디로.

요양원을 나서니 화창하던 봄 하늘이 잔뜩 찌푸려있어 시야가 흐려진다.

맺힌 꿈, 살풀이하듯 한마당 풀어내자고 무더기로 쏟아져 내리는가.

봄비는 기어이 내리고 나는 길을 헤맨다.

기억 속의 시간을 끌어안듯, 어머니의 봄날을 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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