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목련] 이향숙 수필가

한결 보드라운 바람이다. 가벼운 차림새의 사람들로 거리가 부산하다. 방금 채소 수송차에서 내린 상자의 뚜껑을 열자 봄의 향내가 코끝을 살며시 매만진다. 수줍은 매무새로 앉아있는 돌나물은 봄 처녀다. 겨울을 이겨낸 냉이의 빛깔, 달래의 안쓰러울 만치 가늘고 긴 몸은 처녀의 삼단 같은 머리채다. 행여 흐트러질세라 보물 대하듯 조심스럽다.

오이의 자태는 무척이나 길고 지독했던 겨울을 이겨낸 당당함에 눈이 부시다. 투명한 옷을 입은 채 탐스런 몸매를 드러낸 애호박과 녹색의 브로커리가 영글다. 우윳빛의 양송이버섯과 짙은 밤색의 표고, 통통한 새송이버섯, 제주도의 검은 흙 속에서 자라난 당근, 감자들이 미인대회에 출전이라도 하려는 듯 어여쁘고 가지런하다.

과일 상자를 살펴보면 방울토마토는 야물기 그지없다. 맛을 보면 상큼함이 입안 가득하고 달큰하여 잃었던 식욕마저 돋운다. 껍질이 맑은 배는 크기도 모양도 이만저만 눈시굴은 게 아니다. 발그레한 볼을 반짝이는 사과, 금빛의 참외, 참외 빛의 메론, 메론 빛의 수박, 수박빛의 개똥참외, 그리고 봄 처녀의 사랑 같은 딸기의 모양새에 탄성이 절로 난다.

어수선하지만 빠르고 능숙한 손놀림으로 진열대를 채우다 보면 상자를 열었을 때의 감동은 어디로 가고 풍선의 바람 빠지는 소리가 들린다. 봄 처녀 같은 돈나물은 한 칸을 걷어내면 쏟아 놓고 누렇게 변한 잎을 간난 아기 대하듯이 조심스럽게 떼어야 한다. 쪽쪽 뻗은 오이는 아래로 갈수록 점점 웅크리거나 부러지고 마른 상처들이 보인다. 땅속에서 캐낸 감자, 고구마는 호미자국이 난 채로 담겨 있다. 품질에 따라 여문 것은 여문 것대로 포장하여 출하했으면 이런 소용돌이가 일지는 않을 것이다. 소비자들은 응당 당연한 값을 치르고 그 가치에 어울리는 물건을 구입하길 원할 뿐이다.

요즘은 상자마다 출하 지역과 이름을 단다. 가끔은 사진이 붙기도 한다. 이름을 걸고 하는 일이 이래서야 되겠는가.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다. 대부분 농부는 정갈한 것은 그런대로 좀 덜 한 것은 또 그런대로 세상으로 내놓으며 자식과도 같이 어떠한 상술에도 흔들리지 않는다. 이렇게 자신의 자존심을 지킬 줄 아는 농부는 당연하지만 존경받아 마땅하다.

악천후로 농작물의 피해가 컸던 만큼 수입에 의존하는 상품들이 많아졌다. 가격과 품질에서 월등하지 않으면 온전히 우리 것을 지켜낼 수는 없다. 안타까운 눈물, 한숨으로 끌어안았던 것들이 소비자의 불신 앞에 주저앉는다면 그보다 더 가슴 아픈 일이 어디 있을까.

바다를 건너고 하늘을 날아온 수입 농산물들이 버젓이 진열대의 한 자리를 차지하는 것을 막무가내로 막을 수는 없다. 국내산으로 다 채워지지 않으니 궁여지책으로 구색을 갖출 수밖에 없다. 설상가상 그 정갈한 모습들은 금방 산지에서 올라온 듯하다. 딱히 수입 농산물이라 하여 꺼리는 이도 없고 겉보기에 좋고 맛도 뒤지지 않아선지 젊은 소비자의 손길이 분주하다. 터줏대감 노릇을 하려 한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이들이 우리 농토에서 나는 농산물을 소중히 여기고 원산지를 꼼꼼히 확인한다. 이런 모습들이 아직은 우리 것을 지킬 수 있다는 희망이다. 그럴 때 농부가 농산물에 이름표를 붙이며 자존심을 지킨다면 진정한 봄의 보드라운 바람이 감싸 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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