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논단] 황종환 중국 칭화대학 SCE 한국캠퍼스 교수‧한국자산관리방송 논설실장

한낮에 내리쬐는 뜨거운 햇빛이 예사롭지 않다. 이제 성하(盛夏)의 계절이 성큼 다가왔다. 이른 더위가 한여름을 방불케 하는 것을 보면 계절도 방황할 줄 아는 모양이다. 햇살이 뜨거워서 길을 걸어갈 때면 응달이나 나무 그늘을 찾는다.

얼마 전까지 아카시아향이 주위에 짙게 깔렸고, 이팝나무 하얀 꽃에 숨이 막힐 만큼 취했다. 활짝 핀 하얀 꽃이 세상을 온통 뒤덮으면서 봄은 소리 없이 살짝 물러섰다. 봄꽃이 지는 것이 서러워서인지 파란 하늘 한쪽에 하얀 뭉게구름이 뭉쳐있다. 봄의 화려함은 아쉬워할 틈도 없이 빠르게 지나간다. 신록이 초록으로 이어지는 길목에서 봄의 세레나데가 들려오는 듯하다. 봄의 향연을 베풀어준 자연의 흔적에 감사하며 위로를 삼는다.

아파트 출입구 한쪽 정원에 피어있는 연분홍 작약과 하얀 수국이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반겨준다. 길가 화단에 붉게 핀 자산홍과 바위틈에 솟아난 들꽃이 어우러져 참으로 보기가 좋다. 계절의 여왕 오월의 넝쿨장미가 담장을 타고 올라 고개를 내밀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따듯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정호승 시인은 장미같이 아름다운 꽃에 가시가 있다고 생각하지 말고, 이토록 가시 많은 나무에 장미같이 아름다운 꽃이 피었다고 생각하라고 말했다. 가시 많은 나무가 향기로운 꽃을 피우듯 삶의 그릇도 고통을 견뎌내면서 더욱 단단해진다. 길가에 핀 가시장미와 들꽃에서 삶의 지혜를 찾는다.

비가 내리는 것이 그렇게 반갑지는 않다. 우울한 것보다는 낙천적인 것이 좋고, 어두운 것보다는 밝은 것이 좋기 때문이다. 하지만 요즘 결정적 순간에 늘 비가 왔다. 벚꽃이 흐드러지게 필 때는 기다렸다는 듯 비가 내리고, 더위가 사물사물 찾아오기 전에도 자주 비가 내렸다. 비가 계절의 변화를 알려주는 신호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얼마 전 전국적으로 곳곳에 산불이 발생하였을 때도 적시에 봄비가 내려 진화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비가 내린 후 해가 환하게 빛나는 것처럼 때로는 반갑지 않은 상황에서 전화위복이 될 수 있다. 자연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나름대로 쓸모가 있다.

손자와 함께 자주 산책길을 걷는다. 아이들은 비를 좋아한다. 집을 나설 때 알록달록한 우산을 챙기고 펼치는 일이 신기하고, 장화를 신고 물이 고인 곳을 찾아 잘바닥거리며 뛰어다니는 일이 나름 재미있는 놀이가 된다. 손자의 즐거워하는 얼굴을 바라보는 순간 삶의 여백이 채워지는 기분이다. 인간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공존하는 사회에서 서로 배려하고 인정하는 것이 화합의 시작이다. 주변을 따뜻하고 여유로운 시선으로 바라보면 사고의 공간이 확장되고 내면은 화학적으로 결합하게 된다. 무엇보다 주위에 적대적인 감정을 가진 사람이 없을 때 평온해진다.

요즘 언론에 자주 등장하는 사회 지도층 자녀 입시비리와 학교폭력, 불건전한 주식 및 코인 투자 등 다양한 사건들이 세간의 논란이 되고 있다. 더욱이 일부 정치인들의 내로남불 태도는 많은 사람들에게 피로감을 안겨주고 상대적 박탈감과 허탈감에 빠져들게 한다. 권력을 향한 단순한 열정에 취한 정치인은 다른 진영의 정치인이 그랬다면 무분별하다고 비판했을 생각과 행동을 스스럼없이 저지른다. 비슷한 일로 입장이 바뀌게 되면 상대방을 공격하는 수위가 더욱 높아진다. 자신에게는 너그럽고 남에게는 엄격하기 쉬운 인간의 본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이제 이런 논리는 한 단계 더 높아진 국민들에게는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평소 가까이 지내고 따르는 칠십대 중반의 베스트셀러 작가 한분이 최근 출간한 산문집에 자신이 겪었던 지난 일에 대한 소회를 적었다. 그분은 유미주의 기질이 강한 편으로 영원한 청년작가라고 불러주기를 좋아했으며, 영원히 현역작가로 살고 싶다고 자주 말씀하셨다. 한 7년여 전 미투 열풍이 몰아칠 때 뜻하지 않게 연루되어 자의 반 타의 반 침묵해온 오욕의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누구인지도 전혀 생각나지 않는 어떤 분이 트위터를 통해 ‘몇 년 전 이러저러한 자리에서 이러저러한 것을 보고 들었다’라고 올린 글을 언론이 받아 대서특필하는 바람에 벌어진 일이다.

다음날 자리를 함께 했던 분들이 아무런 과오가 없었다고 확인하는 글을 페이스북에 올리고 언론사에 소상히 서술한 긴 메일을 보냈다고 한다. 처음에는 글을 올린 분이 직접 언짢은 일을 당했다는 것도 아니므로 곧 지나갈 소낙비라고 생각하고 ‘자신으로 인해 어떤 식이든 마음의 상처를 받은 분이 있다면 그 누구에게든지 미안하다’는 글을 트위터에 올렸다. 그렇지만 가부장제라는 명분에 기대 여성들에게 관행적으로 상처받을 행동이나 말을 한 일이 왜 없었겠는가를 생각하며 부끄러웠고 후회했고 자책했다고 한다. 그 일로 매년 발표하던 소설을 수년간 쓰지 못한 채 시간이 지나갔다. 지금까지 적극적인 해명이나 대응을 하지 않고 시간이 한참 지나 최근 출간한 산문집 한쪽에 자신이 전하고 싶은 말을 대신 글로 쓰지 않았을까 싶다.

모든 생명체는 생존과 재생산을 위해 최적화되어 있다. 행복이 삶의 최종 목적이라는 것은 비과학적인 인간중심적 관점이다. 행복은 삶을 지탱하기 위한 필요한 도구이다. 행복은 경험의 절대성으로 관념적 생각이나 가치가 아닌 유쾌한 경험의 축적이다. 유쾌함은 추구하는 방향으로 전진하게 하고, 불쾌함은 조심하고 정지하여 후퇴하게 한다. 가장 확실하고 행복한 일은 편한 사람과 맛있는 음식을 함께 하는 것이다. 좋은 친구와 연인의 존재는 행복한 삶을 위해 필수불가결하다. 어린아이가 유모차에 태워져 있는 잠자는 일상의 장면은 행복을 압축하여 보여준다.

삶이 피곤하고 지칠 때마다 일이나 활동을 줄이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할 때가 종종 있다. 하지만 아주 간단한 방법이라고 해서 사회적 고립을 자초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은 일이다. 영원한 청년작가를 꿈꾸던 작가의 인고의 세월과 최근 일부 지도층과 정치인이 보여준 내로남불 같은 태도가 순간 묘하게 겹쳐진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욕심을 버려야 한다는 말을 수없이 들었지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집착하고 있다는 사실이 참 아이러니하다. 이제 첫 단추부터 다시 꿰는 시간이다. 사회 지도층의 대인춘풍 지기추상(待人春風 持己秋霜)의 자세가 필요하다. 잘 물든 단풍은 봄꽃보다 아름답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 오월의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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