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땐 참으로 가난했던 시절이었다.

누가 잘 살고 누가 못 살고 할 것 없이, 그저 삼시 세 끼 밥이나 건너뛰지 않으면 만족한, 그런 시절이었다.

연만희 평화한약방 원장(73)은 1951년 4월 11일 충북 도안면 석곡리 농가에서 9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모친 43세에 낳았으니 늦둥이였다.

9남매를 건사하는 부모님은 늘 가난에 허덕였다.

그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삶, 공부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등불을 켜면 기름 닳는다는 아버지의 핀잔이 이어졌으니, 그땐 공부를 해서 입신양명하는 청운의 꿈을 키우는 것보다 어떡하면 제 앞가림이나 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을 더는 게 무엇보다 중요했다.

 

나는 왜 이렇게 못났을까

도안초, 세광중, 증평공고를 졸업하고 그는 무작정 가출을 했다.

집안에 한 입 더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서울 무학여고 앞 행당동 목욕탕에서 청소일을 했다. 먹고 자는 셈을 빼면 그에게 돌아오는 돈은 없었다. 그래도 그나마 그것이 최선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큰 형님이 그를 찾으러 왔다. 막일을 하는 막둥이가 부모님은 늘 눈에 밟혔나보다.

가출했다가 돌아오니 어머니는 남들처럼 빨리 취직해서 돈을 벌어야 제 구실을 할 수 있다고 하셨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 대학은 꿈도 못 꿀 일이었다.

짧은 서울 생활을 접고 집으로 온 뒤 생각했다.

‘나는 참 잘난 구석이 없구나.’

몸도 왜소하고 공부도 잘하지 못했던 탓에 사회에 진출한다 한들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는 사회생활에 막연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

고민이 깊을수록 비관적인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나는 왜 이렇게 못났을까, 나는 왜 사는 걸까, 사람이 산다는 건 무엇일까.’

이런 저런 상념 속에 방황을 거듭했다.

 

▲ 서암 김희진 선생(왼쪽 세번째)이 살아계실 때 한 컷. 서울서 요식업을 하고 있는 큰아들 규일(왼쪽)과 동신대 한의학과에 입학해 가업을 잇게 되는 둘째아들 상훈씨(왼쪽 두 번째)의 어릴 적 모습이다.
▲ 서암 김희진 선생(왼쪽 세번째)이 살아계실 때 한 컷. 서울서 요식업을 하고 있는 큰아들 규일(왼쪽)과 동신대 한의학과에 입학해 가업을 잇게 되는 둘째아들 상훈씨(왼쪽 두 번째)의 어릴 적 모습이다.

 

한학에 입문하게 한 한석봉 천자문

그러던 어느 날 윗방 구석에 처박혀있던 ‘한석봉 천자문’이 눈에 들어왔다.

붓글씨로 쓰여있는 것이 보기가 좋았다.

그는 생각했다.

‘여기에 내 삶이 있을지도 몰라.’

천자문을 배우며 방황의 아픔을 잊고자 했다.

그러려면 스승님이 필요했다.

아버지께 여쭤보았다.

“아버지, 저 한문 공부를 하고 싶은데 어디 가면 배울 수 있나요?”

아들을 빤히 바라보던 아버지는 의외로 쉽게 허락했다.

“그려? 잘 생각했다. 우리 집안에 학자가 없어 축문 읽을 사람도 없었는데 네가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냐. 십 여리 떨어진 곳에 류기영(柳基永) 선생이 있는데 한학자에 풍수에도 조예가 깊은 분이다. 내가 잘 아는 분이니 부탁하면 잘 가르쳐줄 거야. 내일 당장 떠나거라.”

 

세상을 넓게 보고 큰 뜻을 가져라

그의 한학 공부는 그렇게 시작됐다.

고희를 훌쩍 넘긴 지금 생각해 봐도 한학 공부에 뜻을 두었던 젊은 시절은 자신의 삶을 은성하게 만든 신의 한수였다.

2년여를 공부하던 중 선생은 개인사정으로 더 가르쳐주실 수 없다고 안타까워하시며 말했다.

“우리나라는 지형 상 못자리판 같아서 태어난 곳에서 살게 되면 큰 결실을 맺지 못한다. 모판에서 자란 것을 논에 나누어 심어야 많은 수확을 하는 것처럼 고향을 떠나 세상을 넓게 보고 뜻을 크게 가져라.”

귀중한 말씀이셨지만, 그에겐 청천벽력 같은 것이었다.

여기서 배움이 막히는 것은 아닌가 걱정이 됐다.

며칠간 마음을 잡지 못하고 힘들어 하는데, 우연히 부여군 은산면 가곡리 곡부서당의 서암(瑞巖) 김희진(金熙鎭) 선생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뒷날 알고 보니 서암 선생은 구한말 호남의 대유학자였던 간재(艮齋) 전우(田愚) 선생의 학맥을 정통으로 이으신 분이었다.

당장 편지를 드렸더니 선생님께서 바로 답장을 주셨다.

당장 오라는 것이었다.

고민과 방황의 삶에 서광이 비치는 것처럼 보였다.

선생님의 수제자인 성백효 사형을 처음 만난 것도 그때였다.

서암 선생은 그에게 ‘뜻을 세우는 것이 공부의 첫걸음’이라고 하시면서 율곡 선생의 성학집요(聖學輯要)부터 시작해 대학, 논어, 맹자, 중용을 읽도록 해주셨다.

아침 일찍부터 저녁 늦게까지 학우들의 글 읽는 소리. 낭랑한 그 소리가 그는 참 좋았다.

책 읽는 소리를 들으면 그 글귀에 머리에 쏙쏙 들어왔다.

게다가 선생의 인자하고 너그러운 성품은 그가 평생 본받고 싶은 무언가의 가르침이었다.

 

조선 후기 대학자 간재 전우 선생

스승인 서암 선생이 학풍을 이어받은 간재(艮齋) 전우(田愚)는 대한제국 중추원 참의를 지낸 인물이었다.

조선 후기 학자인 그는 1841년 전라북도 전주에서 태어나 1922년 향년 82세로 전라남도 담양에서 별세했다.

채용신이 1920년 그린 간재 전우의 초상화는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540호로 지정돼 있을 정도로 그는 조선 후기를 관통하는 대학자였다.

‘안자편’, ‘연원정종’, ‘간재집’ 등을 저술했다.

그는 1882년(고종 19년) 조정으로부터 선공감가감역(繕工監假監役)·선공감감역·전설사별제(典設司別提)·강원도도사에, 1894년 사헌부장령, 이듬해 순흥부사·중추원찬의(中樞院贊議)를 제수받았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오직 학문만을 삶의 전부로 여긴 학자에게 벼슬길은 하찮은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명성이 널리 알려지자 개화파들의 공격이 시작됐다.

1895년 박영효(朴泳孝) 등이 그를 수구(守舊) 학자의 우두머리로 지목해 개화를 실현시키려면 그를 죽여야 한다고 여러 번 청했다. 그러나 고종의 승낙을 얻지 못했다.

1908년(순종 2년)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왕등도(暀嶝島)·군산도(群山島) 등으로 들어가 나라는 망하더라도 도학(道學)을 일으켜 국권을 회복하겠다고 결심했으며, 부안·군산 등의 앞 바다에 있는 작은 섬을 옮겨 다니며 학문에 전념했다. 1912년 계화도(界火島)에 정착해 계화도(繼華島: 중화를 잇는다는 뜻)라 부르면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저술과 제자 양성에 힘썼다.

 

▲ 우암 송시열 선생 묘소 앞에서 아내 박영희씨와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다. 우암은 연만희 원장이 늘 경외하는 스승으로 여기고 있다.
▲ 우암 송시열 선생 묘소 앞에서 아내 박영희씨와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다. 우암은 연만희 원장이 늘 경외하는 스승으로 여기고 있다.

 

배움의 길은 끝이 없고

나이가 차 군대에 가게 됐다.

3년간의 군복무를 마치고 서당에 복귀했지만 삶의 방황이 다시 시작됐다. 고질병이었다.

전남 보성에 있는 서당을 알게 됐다.

역시 간재 선생의 학통을 이어받은 송담(松潭) 이백순(李栢淳) 선생이 그곳 훈장으로 계셨다.

몇몇 동문 형들과 함께 갔는데 선생은 중용의 박학(博學), 심문(審問), 신사(愼思), 명변(明辯), 독행(篤行)의 정신을 공부자세로 강조하시면서 그에게는 통감강목을 가르치셨다.

한편으론 강직하고 시비곡절을 분명히 하셨던 선생의 언행 또한 그에게는 무언의 가르침이었다.

배움이라는 것, 그리고 학문을 통한 깨침이라는 것은 늘 끝이 없었다.

그것은 일순의 희열로 다가오기도 하고 또 어느 땐 감동으로 찾아오기도 했다.

하지만 목구멍이 포도청, 서당 생활을 언제까지나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때 그가 눈길을 주게 된 것은 한의학이었다.

 

자네 얼굴을 보니 의원이 될 상이군

그가 한의학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우연한 것이었다.

부여 서당 시절 몸이 몹시 아팠을 때 성백효 사형이 처방해준 한약을 먹고 나았던 것인데, 사람의 몸이 약을 먹고 씻은 듯이 낫는다는 게 참 신기했다.

그때 마침 그는 충북 음성에서 개업 중인 구봉(九峯) 정조헌(鄭祖憲) 선생을 소개받고 찾아 뵙게 됐다.

학처럼 깨끗한 모습이 신선 같았다. 구봉 선생이 눈을 지그시 감고는 말씀하셨다.

“그간 많은 사람들이 약을 배우러 왔는데 제대로 배운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네. 그런데 자네의 얼굴을 보니 의원이 될 것 같구먼. 무엇보다도 많은 한의서를 읽어 지식을 쌓도록 하게. 그리고 약값을 생각하기 이전에 환자의 마음과 처지를 역지사지하면서 측은지심으로 대해야 한다네.”

구봉 선생을 처음 뵙는 자리에서 해주신 그 말씀은 이후 그의 삶의 신조가 됐다.

선생의 지도 속에서 열심히 공부했다.

그리고 1983년 한약업사 국가시험에 합격해 고향 증평에서 ‘평화한약방’이란 간판을 걸고 개업을 하게 됐다.

 

한의학의 깊이와 인체의 신비

평화한약방을 개원한 초기에는 참으로 어려움이 많았다.

모든 게 서툴고 어려웠다.

“제가 가지고 있는 한의학에 대한 지식이 부족한 탓이었지요. 더구나 환자를 관형찰색(觀形察色)하는 안목을 갖추지 못했었습니다. 아, 나는 한참 멀었구나,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이제부터 진짜 공부를 해야겠다. 사람에게 생기를 불어 넣어주는 진짜 한의학을 공부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됐습니다. 이런 저런 한의서들을 섭렵했어요. 특히 마의상법(麻衣相法)을 비롯한 관상 책들을 두루 찾아봤습니다. 관상을 안다는 것은 그 사람에 내재돼 있는 많은 부분을 살펴볼 수 있는 것이었으니까요.”

공부를 하면서 많은 의학서들을 섭렵하고 환자들을 대하니 점점 질병과 체질은 물론 환자들의 성격까지 눈에 보였다.

환자의 고충을 듣기도 전에, 그들을 진맥하지 않고도 증상을 알아낼 수 있는 것도 이런 공부 가 밑바탕이 됐다.

문진도 하기 전에, 진맥도 없이 환자의 상태를 정확하게 꿰뚫는 그의 ‘신통력’을 두고 사람들은 종종 족집게 같다며 놀라기도 했다.

그러나 한의학을 공부하면 할수록 더욱 어려웠다.

한의학의 깊이와 인체의 신비 앞에서 그는 여전히 턱없이 부족함을 자각하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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