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목련] 정혜련 사회복지사

요리할 시간은 충분하지 않지만, 대충 먹고 싶지 않아 집 근처 가까운 음식점을 들어갔다. 콩나물이 잔뜩 보이는 뚝배기 사진을 보고 들어갔건만, 순대국밥 집이었다. 다른 곳을 갈 여유도 없고, 다른 음식점을 찾자니, 번거로웠다. 용기 내어 순대국밥을 주문했으나, 합격발표 기다리는 수험생보다 더욱 초조하고 긴장되었다. 평소에 순대도 즐기지 않는데, 순대국밥이라니!

그러나 주문은 들어갔고, 부지런한 사장님께서 내 앞에 빨갛게 빛깔 고운 깍두기, 싱싱한 오이고추와 쌈장을 차려주셨다. 정 아니다 싶으면 깍두기랑 쌈장 찍은 고추로 한 끼 때운다는 결심을 하고 주방 쪽을 보니, 성큼성큼 다가오는 순대국밥이 눈에 들어왔다. 다행히 먹음직스러운 콩나물이 순대를 가려주어 고마웠다.

밥 한술 떠먹고 콩나물을 젓가락으로 집어 조심스럽게 입에 넣었다. 간이 딱 맞는 얼큰하고 고소한 국물 맛에 촉촉해진 콩나물이 아삭거렸다. 헉! 어느 서스펜스 드라마보다 소름 돋는 반전에 멈칫했다. 두 번째는 젓가락 대신 숟가락을 들고 용감하게 순대까지 보태서 국물을 떠먹었다. 순대는 일반 분식집 순대가 아니라, 진짜 순대였다. 냄새가 전혀 나지 않고 찰진 식감이 국물과 어울려 입맛을 부추겼다. 최근에 밥을 반 공기 이상 못 먹던 내가 순대국밥 한 그릇과 밥 한 공기를 뚝딱 해치웠다. 무슨 조화인지 예상시간보다 너무 빨리 먹어서 여유 있게 약속장소로 이동까지 했다.

그날 이후 나는 내가 좋아하는 파스타를 먹어도, 한우 안심구이를 먹어도, 순대국밥이 눈에 아른거렸다. 약속이 없을 때는 혼자서 순대국밥을 먹으러 갔는데, 거의 매일 출근 도장을 찍는 나를 사장님도 알아보셨다. 내가 “저기요”라고 하면 사장님께서 “보통 매운맛에 순대랑 내장만이죠?”라고 하신다. 순대가 부족하다 싶으면 아예 순대 한 접시를 따로 시켜 국밥이랑 먹었다. 자기 전에 “내일 순대국밥 먹으러 가야지!”라고 생각만 해도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이건 사랑이 틀림없다. 내 다이어트 식단을 망쳐놓은 그를 미워할 수도 없었고, 급기야 친구까지 데려가 같이 먹었다.

믿지 못하는 이도 있겠지만, 나는 이전까지 순대국밥을 먹어 본 적이 없다. 불교에서는 무상(無常)이라 하여 모든 것이 변하고, 영원한 것은 없으니 헛되고 헛되다 했던가! 나의 순대국밥에 대한 사랑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다른 동네 국밥집까지 먹으러 다녔다. 미슐랭 별점 주는 평가단처럼 나만의 국밥 지도도 만들었다.

나이가 들어가며 새로운 것은 없고, 이미 만들어진 내 취향은 특별한 일 없으면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순대나 내장의 특유한 냄새를 싫어해서 평생 순대국밥 근처도 안 갈 것 같던 내가 삼시 세끼 순대국밥을 먹어도 되는 사람이 되었다. 모든 현상이 머물지 않고 변화할 수 있다는 사실을 무시한 것이 ‘나’라는 사람을 규정하고 ‘내 취향’을 만들고 결국 ‘나’의 어떤 것에 집착을 불러일으키진 않았을까? 이런 집착이 날마다 새롭게 살 수 있는 행복을 방해하지는 않았을까? 평생 먹지 않을 거라 확신하고, 싫어했던 대상을 이렇게 사랑하게 될 수 있다는 것이 우습기도 하고, 한편으로 희망적이다.

취향 하나 바뀌어서 이렇게 즐거운데, 내 마음이 바뀌고, 내 관점이 바뀐다면 아니, 바뀔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면 얼마나 더 즐거울까? 이렇게 살다 보면 내 욕심으로 살지 않고 진실한 나로 살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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