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목련] 이향숙 수필가 

듬성듬성 좌판은 이가 빠졌다. 해저녁에 구경 삼아 나온 재래시장은 남의 동네라선지 풍경이 설다. 얼기설기 이어진 통로에 이정표처럼 불이 켜진 안노인의 좌판 위는 갈증에 지친 푸성귀가 시름 앓는다. 된장찌개에 넣을 채소가 필요하던 차에 몇 가지 집어 들자 시들었던 노인의 안색이 푸릇해진다.

멸치육수 냄새를 따라 허름한 식당에 들어섰다. 외관과는 달리 한쪽 벽면은 방송을 탄 흔적과 연예인들의 사진이 가득하다. 주인장이 호기롭게 추천한 메뉴는 잔치국수였다. 기다렸다는 듯이 금방 나온 국수는 너무 푸짐하여 남편에게 덜어 주었다. 국물부터 한 숟가락 떠먹자 저절로 눈이 감겼다. 본격적으로 먹으려 자세를 잡고 국수를 후루룩 넘겼다. 남편도 희색만면하여 젓가락질이 분주하다.

주인장이 문을 닫으려던 차에 들어선 마지막 손님이라며 옆 테이블에 앉는다. 한숨을 내뱉는 입술이 거칠다. 눅진한 음성으로 일흔이 넘도록 시장 한구석에서 붙박이처럼 살아내는 당신의 삶을 끌어내었다. 낯선 이에게 거침없이 쏟아 놓는 설움에 젓가락이 머뭇거린다.

그 시절엔 흔한 일이었을까. 스물이 채 안된 나이에 밥숟가락 줄이려고 결혼을 했단다. 이쪽 형편은 더 궁색해 갓난아이를 업고 국수를 말기 시작한 지 오십여 년이 흘렀다. 시장통 단칸방에서 키운 사남매는 밥벌이할 나이가 되어도 맡겨 놓기라도 한 듯이 손을 벌려 고단해도 일을 놓을 수 없다. 허울 좋은 퇴근은 식당 골방에 노구를 누인다. 효도 여행은커녕 명절날도 쉬지 못하고 국수를 말아도 자식들이 끌어안고 있는 깨진 독은 채워지지 않는다. 배우지 못한 것이 한이었던 당신의 삶을 닮지 않기를 바랬는데 그 또한 따라주지 않았다며 모든 것이 서럽단다.

처음부터 손님이 줄을 선 것은 아니었단다. 모친의 손맛을 물려받았어도 파리를 쫓느라 그 손이 더 바빴다. 국물의 맛을 내려 재료를 장만하려 해도 밑천이 없었다. 채소 전에서 시든 무를 헐값에 들이고 어물전에서 멸치며 다시마를 외상으로 마련해 흉내 내어도 그다지 손님이 늘지 않았다. 어린것들에게 팔다 남은 국수를 끼니로 먹이며 한숨으로 식혀주었다. 골방이 비좁아 식당 바닥에 이부자리를 깔고 괭이잠을 자도 밤새워 육수를 끓일 땐 내일은 오늘보다 한 그릇만이라도 더 팔게 해달라고 빌었다.

국수는 무엇이었을까. 먹을거리가 시원찮은 시절에 주머니가 가벼운 이들도 든든한 한 끼를 책임질 수 있었다. 생일을 맞은 이들에게 오래 살라는 축원의 음식이며 결혼식에선 신랑 신부의 인연이 오래도록 이어져 행복하게 살라는 의미이다. 그런 국수 한 그릇을 손님상에 내기 위해 평생을 하루같이 육수를 끓이고 면을 삶았다. 맛나게 먹었다는 객의 인사로 위안을 얻었고 푸지게 넘치지는 않지만 값을 치러 주니 결국 자식 손에 들어갈지라도 당장은 든든했단다. 한편으로 고단해도 허리는 반듯하니 두 다리로 걸을 수 있는 것도, 자식이 원수라면서도 해줄 수 있어 그 또한 감사한 일이란다. 주인장의 푸념이 나의 삶과 덧놓여진다. 앞만 보고 달리느라 아이들이 어디쯤 오는지 알지 못하였기에.

역지사지로 한 그릇의 잔치국수가 되기까지 사람의 손을 거쳐 열탕과 온탕을 오간 국수의 처지를 생각하며 나온 통로는 이정표를 찾을 수 없다. 푸성귀를 팔던 안노인의 뒷모습마저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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